선을 긋는 사람들

[선을 긋는 사람들 6편] 쿠르드족 — 조약으로 약속받고, 조약으로 사라진 나라

오십보 백보 2026. 7. 18.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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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긋는 사람들 6편] 쿠르드족 — 조약으로 약속받고, 조약으로 사라진 나라

여러분, "선을 긋는 사람들" 여섯 번째 이야기입니다. 5편 사이크스-피코 협정 끝자락에서 예고했던 그 이야기, 나라 없는 최대의 민족 쿠르드족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조약으로 약속받고, 조약으로 사라진 나라


오늘의 장면 — 지금 이 순간, 네 나라에 흩어진 사람들

2025년 5월 12일, 쿠르드노동자당(PKK)은 40년 넘게 이어온 무장투쟁을 끝내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두 달 뒤인 7월 11일, 이라크 북부 술라이마니야 인근에서 실제 무장해제 행사가 열렸습니다. 전사 30명이 무기를 불태우는 상징적인 의식이었습니다. 1984년부터 이어진 이 분쟁으로 4만 명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쿠르드족은 터키 남동부, 이란 서부, 이라크 북부(쿠르디스탄 자치정부), 시리아 북동부(로자바) 네 나라에 걸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정확한 인구는 자료마다 차이가 크지만, 합산하면 대략 3천만에서 4천만 명 안팎으로 추정됩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 없는 민족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답의 상당 부분은 1920년과 1923년, 단 3년 사이에 있습니다.


선은 어떻게 그어졌나 — 약속과 소멸, 3년의 간격

5편에서 다룬 사이크스-피코 협정(1916) 이후, 1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패전국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어떻게 처리할지 정하기 위해 1920년 세브르 조약이 체결됩니다.

세브르 조약 1920 — 처음이자 마지막 약속

 

이 조약은 쿠르드 자치와, 일정 조건 아래에서의 독립 가능성을 국제조약에 처음으로 담아낸 문서였습니다. 완벽한 독립 보장은 아니었지만, 국제사회가 문서로 쿠르드족의 미래를 언급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쿠르드족 지도자들은 이 조약에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3년 뒤인 1923년 로잔 조약이 체결되면서, 쿠르드 문제는 사실상 지워집니다. 그 사이 무스타파 케말(아타튀르크)이 이끄는 터키 민족주의 세력이 그리스군을 격퇴하고 연합국과 새로운 협상력을 갖게 됐습니다. 세브르 조약은 폐기됐고, 로잔 조약이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쿠르드 관련 조항은 통째로 빠졌습니다.

로잔 조약 1923 — 3년 만에 지워진 조항

 

쿠르드족은 1920년에도, 1923년에도 협상 테이블에 없었습니다. 터키 공화국 초기에는 쿠르드인의 별도 정체성을 부정하는 동화 정책이 강화됐습니다.


현지인은 어디에 있었나 — 쿠르드족은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오해를 하나 짚어야 합니다. '쿠르드족'은 단일하고 균질한 집단이 아닙니다.

 

언어만 봐도 그렇습니다. 쿠르드어는 쿠르만지어, 소라니어 등 여러 갈래로 나뉘는데, 서로 상호이해성이 제한적일 만큼 차이가 큽니다. 문자 체계도 다릅니다. 정치적으로도 터키의 PKK, 이라크의 KDP·PUK, 시리아의 PYD가 서로 이념과 전략이 다르고, 쿠르드 세력 사이에 갈등이 벌어진 적도 있습니다.

네 나라에 흩어진 사람들 — 2025년 쿠르드족 분포

 

4개국에 나뉜 것은 외부의 선이 만든 결과지만, 그 선 안에서 100년을 살아오며 각 지역의 쿠르드족은 각자의 역사를 만들어왔습니다. "쿠르드족이 하나의 목소리로 독립을 원한다"는 말은 지나친 단순화입니다. 이 내부 복잡성 자체가 식민지 선 긋기가 남긴 또 다른 유산입니다.


선이 만든 결과 — 탄압, 자치, 그리고 92%의 투표

터키에서는 케말 이후 수십 년간 쿠르드어 사용에 제약이 있었습니다. 1978년 결성된 PKK는 1984년부터 무장투쟁을 시작했고, 이후 40년 넘게 이어진 분쟁으로 4만 명 넘는 사람이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2025년, 앞서 말씀드린 대로 무장해제 절차가 시작됐습니다.

 

이라크에서는 1991년 걸프전 이후 북부에 비행금지구역이 설정되며 사실상의 자치가 시작됐습니다. 2005년 이라크 헌법에 쿠르디스탄 자치정부(KRG)가 공식 인정됐고, 2017년 9월 25일에는 독립을 묻는 주민투표가 실시돼 찬성 92.73%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미국, 유럽연합, 유엔, 이란, 터키 모두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라크 중앙정부는 분쟁지역 키르쿠크를 재탈환했습니다. 투표는 무효가 됐고 KRG 대통령은 사임했습니다. 독립국가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자체 의회와 치안 조직을 갖춘 사실상의 자치는 여전히 강하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다만 국제법상 국가로 승인되지 않으면 외교·국경 관리·통화 발행 같은 부분에서 근본적인 제약을 받습니다.

2017년 독립투표 92.73% — 그러나 무효가 된 의사

 

시리아에서는 내전 속에서 쿠르드 세력이 북동부에 로자바라는 자치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자체 행정과 치안 체계를 구축했지만, 국제적으로 국가 승인이나 완전한 자치 인정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오늘의 질문 — 승인받지 못한 자치는, 어디까지 국가인가

92%가 찬성한 독립 투표가 무효가 되는 세상입니다. PKK가 무장투쟁을 접었다고 해서 쿠르드족이 나라를 얻은 것은 아닙니다. 이라크 쿠르디스탄은 자체 여권을 발급하지 못하고, 로자바는 국제 지도에 국가로 표시되지 않습니다.

승인받지 못한 자치 — 국가란 무엇인가

 

그런데 이런 질문이 남습니다. 국가란 무엇일까요. 국제사회의 승인일까요, 아니면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일까요. 쿠르디스탄 자치정부에는 수도 아르빌이 있고, 의회가 있고, 치안 조직이 있고, 석유가 있습니다. 아이들은 쿠르드어로 학교를 다닙니다.

그 모든 것이 있는데도, 국가는 아니라고 합니다.

 

1923년 로잔 회의실에서 쿠르드 관련 조항을 지운 외교관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사라진 몇 줄의 문장은, 지금 이 순간에도 수천만 명의 삶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다시 지도 위의 선으로 돌아가, 5주 만에 남아시아를 가른 인도-파키스탄 분할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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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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