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긋는 사람들 17편] UAE — 7개의 토후국이 하나의 연방이 되었을 때
[선을 긋는 사람들 17편] UAE — 7개의 토후국이 하나의 연방이 되었을 때
여러분, "선을 긋는 사람들" 열일곱 번째 이야기입니다. 14편의 반대편에 있는 사례입니다. 남수단과 에리트레아는 있던 나라를 쪼갰고 실패했습니다. UAE는 따로 있던 정치체들을 합쳤고, 지금까지는 성공했습니다.

오늘의 장면 — 2025년, 두바이
높이 828미터,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 부르즈 할리파 아래로 고속도로와 항만, 유리 마천루가 지평선까지 뻗어 있습니다. 두바이국제공항은 세계 최다 국제선 여객을 처리하는 공항 중 하나이고, 세계은행 현재 달러 기준 2024년 UAE의 1인당 GDP는 약 5만 달러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54년 전인 1971년 12월, 이곳에는 오늘날의 의미로 완전히 독립된 일곱 나라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영국과의 조약 아래 각자의 통치자가 다스리던 일곱 토후국이 있었습니다. 영국이 떠난 뒤 각자 독립할 수도, 하나의 연방을 만들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들은 연방을 선택했습니다.
선은 어떻게 그어졌나 — 영국이 물러난 뒤 남겨진 선택지
이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먼저 '트루셜 스테이트(Trucial States)'를 알아야 합니다. 19세기 초부터 영국은 페르시아만 연안의 아랍 부족 왕조들과 개별 조약을 맺었습니다. 영국이 안전을 보장하는 대신, 각 토후국은 영국 외의 외세와 별도로 관계를 맺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내부 통치권은 각 통치자가 유지했고, 영국은 외교와 안보를 관리하는 보호국적 관계였습니다. 아부다비는 나흐얀 가문, 두바이는 막툼 가문, 샤르자와 라스알카이마는 카시미 가문, 아지만은 누아이미 가문, 움알콰인은 무알라 가문, 푸자이라는 샤르키 가문이 각각 통치했습니다.

이 구도는 150년 가까이 유지되다가, 1968년 초 영국 정부가 1971년 말까지 걸프 지역에서 철수하겠다고 발표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1960년대 후반 경제적 부담이 커진 영국이 '수에즈 동쪽'에 유지하던 군사·외교적 역할을 전반적으로 축소하기로 한 결정의 일환이었습니다.
지역 전체가 충격에 빠졌습니다. 독립된 외교 경험도, 공동 군사력도, 단일 통화도 없는 소왕국들이 갑자기 스스로 미래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1968년 2월, 트루셜 7개국에 바레인·카타르를 더한 9개 지역의 통치자들이 두바이에 모여 연방 헌법을 논의하는 회의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3년간의 협상 끝에 바레인과 카타르는 연방에서 이탈했습니다. 두 지역은 독자적인 행정·정치적 정체성을 갖고 있었고, 연방 참여로 얻는 이익과 독립으로 얻는 자율성을 저울질한 끝에 각자 독립을 선택했습니다. 바레인은 1971년 8월, 카타르는 9월에 독립국이 됐습니다.

남은 7개 토후국도 한 번에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1971년 12월 2일, 아부다비·두바이·샤르자·아지만·움알콰인·푸자이라 6개국이 먼저 연방을 출범시켰습니다. 라스알카이마는 이란과의 영토·도서 분쟁, 연방 내 권력과 재정 배분 문제를 좀 더 지켜보다가 이듬해인 1972년 2월 10일에야 뒤늦게 합류했습니다. 일곱 토후국의 통합은 한 번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협상과 불확실성을 거친 결과였습니다.
현지인은 어디에 있었나 — 자예드와 협상의 무게
"왜 UAE는 다른 아랍 연합 실험과 달리 살아남았는가." 이 질문에는 한 사람이 자주 등장합니다. 1966년 아부다비의 통치자가 된 셰이크 자예드 빈 술탄 알 나흐얀입니다. 1968년 그는 두바이 통치자 셰이크 라시드와 만나 연합을 추진했고, 이는 연방 형성의 중요한 출발점이 됐습니다.

아부다비는 이미 상당량의 석유를 생산하고 있었고, 그 재정적 우위를 개발지원과 인프라 투자로 연결해 다른 토후국들에 연방 참여의 실익을 보여줬습니다. 다만 이것을 자예드 개인의 시혜로만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통합의 성패는 재정 지원뿐 아니라, 각 토후국의 자율성을 얼마나 보장할 것인가에 대한 협상에도 달려 있었습니다. 통합은 부유한 아부다비의 일방적 결정이 아니라, 여러 통치자가 함께 설계한 결과였습니다.

아랍 세계에는 비교할 만한 실패 사례들이 있습니다. 이집트와 시리아의 아랍연합공화국(UAR)은 1958년 출범했다가 1961년 시리아의 쿠데타로 3년 만에 해체됐습니다. 단순히 자원을 나누지 않아서라기보다, 카이로 중심의 정치·행정 집중과 시리아 엘리트의 권력 상실 우려, 군부와 관료조직 간 갈등이 겹친 결과였습니다. UAE가 달랐던 지점은, 아부다비의 재정 우위를 인정하면서도 각 토후국의 통치자와 내부 행정권을 상당 부분 보존하는 느슨한 연방으로 출발했다는 데 있습니다. 미국 무역부 자료에 따르면 UAE 전체 확인 석유 매장량의 약 96%가 아부다비에 집중돼 있습니다. 아부다비가 석유를 독점하지 않았다기보다는, 그 재정적 우위를 연방의 공공재와 개발사업에 연결해 다른 토후국도 참여의 실익을 얻게 만든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선이 만든 결과 — 합치되 완전히 합병하지는 않은 나라
연방 출범 초기 UAE는 매우 느슨한 연합체였습니다. 외교·국방·연방 재정 같은 핵심 분야는 연방이 맡았지만, 경찰·행정·경제정책에서는 각 토후국이 상당한 자율성을 유지했습니다. 1976년 육·해·공군을 통합된 지휘 체계 아래 두는 군 통합이 이뤄지며, 느슨한 연합이 좀 더 실질적인 연방으로 발전했습니다. 요컨대 UAE는 통합했지만 완전히 합병하지는 않았습니다.
두바이는 아부다비보다 석유 매장량과 생산 규모가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초기부터 무역·항만·물류·금융 등 비석유 부문을 적극적으로 키웠습니다. 제벨알리항은 지역을 대표하는 대형 컨테이너항으로 성장했습니다. 2009년 두바이월드의 채무 위기가 터졌을 때 아부다비가 약 100억 달러 규모의 지원을 제공한 일화는, 두바이의 성장 모델이 강력했지만 위기 시에는 아부다비의 재정력과 연방 전체의 신뢰가 안전판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두바이의 성공은 자유시장 신화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연방 내부의 재정적 상호의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화려함 뒤에는 다른 통계도 있습니다. 최근 추정치에 따르면 UAE 거주자의 약 85~90%는 외국 국적자입니다.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아랍 각지에서 온 이주노동력이 도시를 짓고 산업을 운영합니다. UAE 국민은 인구상 소수이지만, 시민권과 정치적 권리는 거의 전적으로 국민에게 귀속됩니다. 경제적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국제화된 사회 중 하나이면서, 정치공동체로서는 시민권이 매우 제한적인 나라인 셈입니다.

이 이중 구조를 지탱하는 장치 중 하나가 '카팔라(Kafala)' 제도입니다. 이주노동자의 체류 신분을 고용주가 보증하는 구조로, 노동자의 이동을 제약해왔습니다. 인권단체들은 임금 체불, 모집 수수료, 여권 압수, 허위 도주 신고 등을 계속 지적해왔습니다. UAE는 최근 몇 년간 일부 노동자의 직장 이동과 체류 관련 제도를 완화하는 개혁도 도입했지만, 체류자격이 고용관계와 연결되는 구조 자체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오늘의 질문 — 자원이 아니라 분배 방식의 차이
14편에서 우리는 "선을 바꿔서 행복해진 나라가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남수단은 석유가 있었지만 그 석유를 두고 내전을 벌였습니다. UAE도 석유가 있었지만, 가장 많이 가진 토후국이 그 재정 우위를 연방의 공공재와 개발사업에 연결했습니다.

UAE의 성공은 석유가 많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아부다비의 재정 우위를 연방 전체의 이익과 연결하면서, 동시에 각 토후국에 일정한 자율성을 남겨둔 연방 설계가 함께 작동한 결과입니다. 두 사례의 차이는 자원의 유무가 아니라, 그 자원을 둘러싼 분배와 권력 배분의 방식이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반대의 경우를 봅니다. 합치려 했는데 쫓겨난 나라, 그리고 그 쫓겨남이 오히려 기회가 된 나라, 싱가포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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