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MO의 경제학 2편] EU는 왜 안 먹고 미국은 다 먹는가
[GMO의 경제학 2편] EU는 왜 안 먹고 미국은 다 먹는가
"같은 과학적 사실 앞에서, 두 개의 대륙은 정반대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이유는 과학 밖에 있습니다."
두 개의 슈퍼마켓
뉴욕의 마트에서 옥수수를 고릅니다. 포장지 어디에도 GMO라는 글자가 없습니다.
미국에서 재배되는 옥수수 상당수가 GMO 품종이지만, 원료 단계에서 GMO 원료일 가능성이 높아도 이를 소비자가 직관적으로 확인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베를린의 마트에서 같은 옥수수를 고릅니다. GMO라면 반드시 표시가 돼 있습니다. 표시가 없다면 Non-GMO입니다. 애초에 유럽연합(EU) 안에서 GMO 작물 재배 자체가 극히 제한적이고, 독일은 그마저도 자국 영토 내 재배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같은 작물, 같은 과학, 같은 시대. 그런데 규제는 완전히 다릅니다. 왜 그럴까요.
1996년, 두 갈래 길
이야기는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해 몬산토의 '라운드업 레디' 대두가 미국에서 상업화됐습니다. 같은 해 미국에서는 GMO 옥수수와 면화도 줄줄이 승인됐습니다.
미국 농무부(USDA), 식품의약국(FDA), 환경청(EPA) 세 기관은 "이 작물들은 기존 작물과 실질적으로 동등하다"는 원칙 아래 빠르게 승인했습니다. 위험이 증명되기 전까지는 허용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바로 그 해, 유럽에서는 전혀 다른 사건이 터졌습니다. 광우병(BSE) 파동입니다.

1996년 3월, 영국 정부는 BSE(소 해면상뇌병증)가 인간에게도 전파될 수 있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수십 년간 "안전하다"고 했던 식품 관리 당국의 말을 믿었다가 뒤통수를 맞은 유럽 시민들은 분노했습니다. 식품 당국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쳤습니다.
그 분노의 한복판에서 GMO가 등장했습니다. 유럽 시민들의 반응은 냉담했고, GMO는 '프랑켄푸드(Frankenfoods)'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과학적 논쟁 이전에, 감정적 거부감이 먼저였습니다.
사전예방원칙 — 유럽이 선택한 다른 논리
이 차이는 결국 두 가지 완전히 다른 철학으로 정착됐습니다.
미국은 위험이 증명되기 전까지는 허용한다는 원칙으로 GMO를 다뤘습니다. 유럽은 안전이 충분히 증명되기 전까지는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전예방원칙(Precautionary Principle)을 택했습니다. 불확실성 앞에서 보수적으로 행동하겠다는 선택입니다.

같은 GMO 기술을 두고 과학적 평가 자체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WHO, 미국 국립과학원, 유럽식품안전청(EFSA) 모두 "현재까지 승인된 GMO 식품에서 건강 위험이 확인된 바 없다"는 입장입니다. 그런데도 유럽은 훨씬 엄격한 규제를 유지했습니다. 그 이유는 과학이 아니라 정치와 문화와 역사에 있었습니다.
WTO 전쟁 — 2003년의 정면충돌
유럽의 GMO 규제는 필연적으로 무역 분쟁으로 번졌습니다.

2003년 5월, 미국·캐나다·아르헨티나 3국은 EU를 WTO에 제소했습니다. 미국의 논리는 명확했습니다. "EU가 과학적 근거 없이 GMO를 사실상 수입 금지하는 것은 불공정 무역장벽"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미국 농업계는 EU의 GMO 거부 때문에 수출 기회를 잃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옥수수, 대두, 카놀라 수출에서 유럽 시장이 사실상 막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2006년 5월, WTO 분쟁 패널은 미국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EU의 GMO 승인 잠정 중지 조치가 위생·식물위생조치 협정(SPS)을 위반한다는 판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결론이 흥미롭습니다. WTO 판결이 났지만 EU의 GMO 정책은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EU는 승인 절차를 조금 손봤을 뿐, 사전예방원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WTO가 이길 수 있는 것은 무역 규칙 위반이지, 한 사회의 가치관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얼마나 다른가 — 구조로 비교
두 체계의 차이는 숫자 하나보다 구조로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구분 미국 EU
| GMO 작물 재배 | 옥수수·대두 등 광범위하게 상업 재배 | 재배 승인 작물은 MON810 옥수수 중심, 스페인·포르투갈 등 일부 회원국에 한정 |
| GMO 재배 금지 | 없음 | 다수 회원국이 자국 내 재배 자체 금지 |
| GMO 표시 기준 | 의도적 사용은 표시 의무, 비의도적 혼입은 5% 미만이면 면제(국가바이오엔지니어드식품표시제) | 0.9% 초과 시 의무 표시 |
| GMO 수입 승인 | 실질적 동등성 원칙, 비교적 신속 | 사안별 심층 심사, 평균 수년 소요 |
반면 수입은 조금 다릅니다. EU도 식품용·사료용 GMO 작물 수입은 심사를 거쳐 허용하고 있습니다. 다만 표시 의무가 엄격합니다. 미국산 GMO 옥수수를 EU에 팔려면 GMO 표시를 해야 하고, 0.9% 기준 아래로만 Non-GMO로 판매할 수 있습니다.
30년 만의 반전 — 2026년 EU의 선택
그런데 바로 지금, 이 30년 된 구도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2026년 6월 17일, 유럽의회는 신육종기술(NGT, New Genomic Techniques) 규정을 최종 승인했습니다. CRISPR 같은 유전자가위 기술로 만든 작물을 기존 GMO와 다르게 취급하겠다는 내용입니다. "외부 유전자를 삽입하는 기존 GMO"와 "자체 유전자를 편집하는 새로운 기술"을 구분하겠다는 것입니다.
규정의 핵심은 NGT 작물을 두 등급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전통 육종으로도 발생할 수 있는 수준의 변형에 그치는 작물(1등급)은 기존 GMO 규제 대신 일반 작물에 준하는 기준을 적용받습니다. 제초제 내성 등 특정 형질을 가지거나 변형 범위가 큰 작물(2등급)은 기존 GMO 규정을 그대로 적용받습니다.
이 규정은 2026년 7월 발효돼, 2년의 전환 기간을 거쳐 2028년 7월부터 본격 적용될 예정입니다. EU GMO 역사에서 30년 만의 가장 큰 방향 전환입니다. 물론 환경단체와 소농 단체의 반발도 거셉니다. 지구의 벗(Friends of the Earth)은 "소비자 권리보다 생명공학 대기업 이익을 우선했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변화는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기후변화로 인한 작물 피해, 가뭄과 병해충 저항성 품종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유럽에서도 규제의 논리가 서서히 바뀌고 있다는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왜 이 차이가 지금도 중요한가
미국과 EU의 GMO 규제 차이는 단순한 식품 정책의 차이가 아닙니다. 무역 전쟁의 최전선입니다.
한국은 이 구도 한가운데 있습니다. GMO 수입 물량 대부분을 미국산에 의존하는 구조라, 규제 체계로는 미국 쪽에 훨씬 가깝습니다. 그런데 소비자 인식은 EU 쪽 경계심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 간극이 지금 한국의 GMO 완전표시제 논란의 배경입니다.
EU가 30년 만에 사전예방원칙을 부분적으로 완화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두 체계가 조금씩 서로에게 다가서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미국은 허용에서 규제로, EU는 금지에서 완화로 — 서로 다른 출발점에서 같은 방향을 향해,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오십보의 정리
GMO를 둘러싼 미국과 EU의 차이는 과학의 차이가 아니었습니다. 1996년이라는 같은 해, 미국에선 GMO 농업이 꽃을 피웠고 유럽에선 광우병이 식품 당국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렸습니다. 그 타이밍의 차이가 30년짜리 규제 분기점을 만들었습니다.

과학이 같아도 역사가 다르면 규제가 달라집니다. 규제가 다르면 무역이 달라지고, 무역이 달라지면 밥상이 달라집니다.
무역 구조가 한 나라의 가계부에 어떻게 찍히는지 궁금하다면 [공부노트] 무역수지와 경상수지 — 한국 경제의 가계부 읽는 법도 함께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규제 하나가 국가 간 힘의 균형을 어떻게 흔드는지 궁금하다면, 같은 구조를 지정학으로 읽은 [쉬어가는 이야기] 호르무즈 해협 — 5,000년 페르시아 문명의 목줄도 연결됩니다.
다음 편에서는 전혀 다른 각도로 GMO를 바라봅니다. 과학자들이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만든 GMO가 왜 20년째 그 사람들의 밥상에 오르지 못하는지, 골든라이스의 역설을 들여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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