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의 식탁

[석유심화 5편] 100년 동안 원유를 끓였다 — KAIST가 그 상식을 뒤집은 방법 / 원유분리막

오십보 백보 2026. 6. 2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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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심화5편] 100년 동안 원유를 끓였다 — KAIST가 그 상식을 뒤집은 방법 / 원유분리막

 


정유 산업 100년의 기본 공식을 뒤집을 수 있는 연구가 국내에서 나왔고, 오늘(2026년 6월 25일) 세계 최고 권위의 과학 저널 네이처(Nature)에 게재됐습니다.

"100년 동안 원유를 끓였다, KAIST가 그 상식을 뒤집은 방법"


원유를 정제하는 방법부터

정유 공장에 가면 하늘 높이 솟은 거대한 탑이 있습니다. 증류탑입니다. 원유는 탄소 사슬 길이가 각기 다른 수천 가지 탄화수소 혼합물입니다. 휘발유, 나프타, 경유, 아스팔트가 모두 이 원유에서 나옵니다. 이것들을 분리하는 방법은 19세기 중반 최초의 정유 공장이 세워진 이후 지금까지 단 하나였습니다.

끓이는 것 vs 걸러내는 것 — 패러다임 전환

 

끓인다.

 

원유를 350℃ 이상으로 가열하면 끓는점이 낮은 성분부터 기화합니다. 탄소 수가 적을수록 끓는점이 낮다는 원리를 이용한 것입니다. 기화한 성분들이 탑 위로 올라가다가 각자의 끓는점에서 다시 액체로 응결되며 층별로 분리됩니다. 이것이 석유 증류의 원리이고, 160여 년 동안 변하지 않은 방법입니다.

 

이 과정에 들어가는 에너지는 어마어마합니다. 전 세계 증류 공정에서만 매년 **1,100 TWh(테라와트시)**의 에너지가 소비됩니다. 한국 전체 연간 전력 소비량의 약 2배에 달하는 수준입니다.


KAIST가 발견한 것 — "원유가 스스로 체를 만들었다"

KAIST 생명화학공학과 고동연 교수·이재우 교수 공동연구팀은 전혀 다른 접근을 시도했습니다. 끓이는 대신 막(膜)으로 걸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리막(Membrane) 기술이라고 합니다.

KAIST 발견 — 원유가 스스로 체를 만들었다

 

분리막 아이디어는 학계에서 오랫동안 연구해온 주제였습니다. 그런데 큰 걸림돌이 있었습니다. 원유는 수천 가지 성분이 섞인 복잡한 혼합물이라, 특정 성분만 통과시키려면 분리막 표면에 정교한 화학 코팅층(선택층)을 반드시 올려야 한다는 것이 정설이었습니다. 이것이 너무 비싸고 복잡해서 상용화 가능성이 낮았습니다.

 

고동연 교수팀은 발상을 완전히 뒤집었습니다. 코팅을 없애면 어떨까? 그냥 값싼 플라스틱 막에 원유를 흘려보내면 어떨까?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시커먼 원유가 맑게 걸러졌습니다. 아무런 화학 코팅 없이, 흔한 다공성 고분자 막(PAN·폴리아크릴로니트릴)을 통과시켰을 뿐인데 말이죠.

 

4년 이상의 연구 끝에 밝혀낸 원리는 이렇습니다. 원유 속 탄소 사슬이 긴 무거운 성분들(중질 성분)이 분리막 내부의 미세 구멍 안에 스스로 들러붙어 2나노미터(nm) 이하의 더 좁은 통로를 자발적으로 만들어냈습니다. 원유가 스스로 자신을 거르는 체를 만든 것입니다.

 

이 현상의 물리학적 원리는 '깁스-톰슨 효과(Gibbs-Thomson Effect)'입니다. 좁은 공간에 갇힌 물질일수록 더 낮은 온도에서도 고체 상태를 유지하려는 성질이 있습니다. 마치 좁은 관 안에 갇힌 물이 냉동고 밖에서도 잘 굳지 않는 것처럼, 중질 성분들이 미세 구멍 안에 자리를 잡되 구멍을 완전히 막지는 않는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면서, 탄소 사슬이 짧은 경질 성분(휘발유·나프타·등유)만 통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연구에는 HD현대오일뱅크가 실제 원유를 공급하며 협력했습니다. 실험실 수준을 넘어 산업 현장 적용 가능성까지 함께 검증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아진 걸까요 — 핵심 데이터

분리막으로 1차 처리 후 잔여 성분만 증류탑에서 처리하는 하이브리드 공정 시뮬레이션 기준으로, 처음부터 증류하는 경우와 비교한 수치입니다.

핵심 데이터와 상용화 경로 — Plug-in 방식

 

항목 감축 효과

에너지 사용량 ▼ 31.6%
이산화탄소 배출량 ▼ 37.6%
운영비 ▼ 36%
연속 운전 내구성 28일 연속 가동 성능 유지 확인

 

이 기술이 국내 정유·석유화학 전 공정에 적용된다면, 연간 약 1,000만 톤의 온실가스 감축이 가능하다는 추산도 나왔습니다. 승용차 약 400만 대가 1년간 내뿜는 탄소량에 해당합니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 — "공장을 새로 안 지어도 된다"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상용화가 안 되면 의미가 없습니다. 이 기술의 가장 강력한 포인트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공동 교신저자인 이재우 교수가 강조한 말을 그대로 옮깁니다. "대면적 모듈화 기술과 장기 운전 기술을 확보해 정유산업의 패러다임 전환에 기여하겠다." 이 목표를 위해 설계된 이 기술의 핵심 장점은 기존 정유 설비에 플러그인(Plug-in) 방식으로 붙이면 된다는 것입니다. 정유 공장 하나를 새로 짓는 데 수조 원이 드는 현실에서, 기존 공장 배관 사이에 분리막 모듈만 끼워 넣어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작동 방식은 단순합니다. 원유가 들어오면 먼저 분리막 모듈을 상온에서 통과시킵니다. 나프타·휘발유·등유 같은 경질 성분이 먼저 분리됩니다. 이미 경질 성분이 빠져나간 나머지 원유만 기존 증류탑으로 보냅니다. 처리해야 할 양 자체가 줄어드니 에너지와 탄소 배출이 함께 줄어드는 구조입니다.


이 연구가 네이처에 실린 이유

분리막으로 원유를 걸러내려는 시도는 전 세계에서 동시에 진행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연구에 공통된 한계가 있었습니다. 정밀 분리를 위해서는 반드시 정교한 코팅층이 필요했고, 분리 속도도 느렸습니다.

 

KAIST 연구의 돌파구는 코팅층 자체를 없애버린 데 있습니다. 값싼 고분자 막에 원유를 그냥 흘려보냈더니 원유 자신이 선택층을 만들어냈다는 발견, 그리고 그 물리적 원리(깁스-톰슨 효과)를 4년의 연구로 규명해낸 것입니다. 이것이 세계 최고의 과학 저널이 이 논문을 선택한 이유입니다.

 

고동연 교수 연구팀은 이번 연구 이전에도 분리막 기반 정유 기술 전망을 담은 글을 사이언스(Science)지에 게재한 이력이 있습니다. 이번 네이처 논문은 하룻밤 사이에 나온 성과가 아니라 수년간 쌓아온 연구의 집적입니다.


그럼 언제 실제 정유 공장에 쓸 수 있을까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아직 갈 길이 멉니다. 현재는 실험실 수준과 컴퓨터 시뮬레이션 단계입니다. 실제 공장에 적용하려면 세 가지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첫째, 수십 미터 크기의 대면적 모듈 제작 기술을 개발해야 합니다. 하루에 수십만 배럴의 원유를 처리하는 공장 규모에 맞게 키워야 합니다. 둘째, 수년 이상의 장기 운전 내구성을 검증해야 합니다. 현재는 28일 연속 가동 데이터만 있습니다. 셋째, 원산지마다 성분이 크게 다른 다양한 원유 조성에 대한 대응력을 확인해야 합니다.

 

업계는 상용화까지 최소 5~10년 이상을 더 봐야 한다고 봅니다.


오십보가 이 기술에 주목하는 이유

석유 심화 4편에서 다뤘듯이, 정유사들은 지금 생존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전기차 보급으로 연료유 수요가 줄고, 탄소중립 압박은 강해지고, 에쓰오일 샤힌 프로젝트(9조 원)처럼 석유화학으로 전환하는 데는 천문학적 비용이 듭니다.

 

그런데 이 분리막 기술이 현실화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기존 공장에 모듈만 붙여 에너지를 31%, 탄소를 37% 줄이면서 운영비도 36% 아낄 수 있다면, 정유사 입장에서는 대규모 투자 없이 탄소중립 의무를 상당 부분 이행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에너지 전환 시대에 정유 산업이 살아남는 새로운 경로가 생기는 것입니다.

 

물론 상용화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방향성이 오늘 네이처에 공식적으로 실렸습니다. 100년 동안 원유를 끓여왔는데, 오늘 KAIST는 끓이지 않고 걸러냈습니다. 아직 공장에 쓸 수는 없지만, 그 방향이 세계가 인정하는 저널에 실렸다는 것. 그것으로 충분히 주목할 성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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