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의 식탁

[석유 심화 3편] 석유 찌꺼기의 반란 — 아스팔트·윤활유·플라스틱이 된 잔유의 경제학

오십보 백보 2026. 6. 16.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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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심화 3편] 석유 찌꺼기의 반란 — 아스팔트·윤활유·플라스틱이 된 잔유의 경제학

1편에서는 원유가 정유소에서 어떻게 분해되는지를 살펴봤습니다. 2편에서는 그 원유가 땅속에서 주유소 앞까지 이동하는 여정을 따라갔습니다. 3편에서는 조금 다른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정유소 맨 아래, 가장 무겁고 끈적한 것들이 남습니다. 가솔린도 아니고, 디젤도 아니고, 등유도 아닌 것들. 보통은 '찌꺼기'라고 부르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 찌꺼기들이 사실은 — 우리 삶 어디에나 있습니다. 도로 아래 깔려 있고, 자동차 엔진 속을 돌고 있으며, 지금 이 글을 읽는 분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 케이스 속에도 있습니다.

: "석유 찌꺼기의 반란 — 아스팔트·윤활유·플라스틱이 된 잔유의 경제학"
: "석유 찌꺼기의 반란 — 아스팔트·윤활유·플라스틱이 된 잔유의 경제학"

 

오늘은 그 이야기입니다.


🏭 정유소 맨 아래에 남는 것들 — 잔사유(殘渣油)란 무엇인가

원유를 가열하면 끓는점이 낮은 성분부터 위로 올라갑니다. 1편에서 다뤘던 분별증류탑의 원리입니다. 맨 위에서는 LPG가 나오고, 그 아래에서 나프타와 등유·디젤이 순서대로 분리됩니다. 그리고 350℃ 이상에서도 기화되지 않고 탑 바닥에 남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대기압 잔사유(Atmospheric Residue)**입니다.

잔사유 분리 흐름도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정유소는 이 잔사유를 다시 한번 처리합니다. 대기압보다 낮은 진공 상태에서 한 번 더 가열하는 감압증류(Vacuum Distillation) 공정입니다. 진공 속에서 한 번 더 분리되면 두 가지로 나뉩니다. 윤활기유와 석유화학 원료가 되는 감압경유(VGO), 그리고 아스팔트의 원료가 되는 **감압잔사유(VR)**가 그것입니다.

 

한편 대기압 증류 단계에서 상단에 분리된 **나프타(Naphtha)**는 석유화학 산업 전체의 핵심 원료로 이어집니다. 찌꺼기와 부산물이 각자의 거대한 시장으로 흘러들어 갑니다.


🛣️ 첫 번째 행선지 — 아스팔트, 지구의 도로를 덮다

감압잔사유의 가장 대표적인 용도가 **아스팔트(Bitumen)**입니다.

 

전 세계 도로의 90% 이상이 아스팔트로 포장돼 있습니다. 2024년 기준 글로벌 아스팔트 시장 규모는 약 **660억 달러(약 96조 원)**이며, 2034년까지 연평균 약 4% 성장해 약 990억 달러 안팎으로 확대될 전망입니다.

 

우리가 매일 밟는 도로가 원유 정제의 '찌꺼기'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생각해보면 꽤 경이롭습니다. 정유소 입장에서도 달갑지 않던 잔여물이 전 세계 인프라의 핵심 소재가 됐으니, 이보다 효율적인 부산물 활용은 드물 것입니다.

 

아스팔트는 방수성과 접착성이 뛰어나 도로 포장 외에도 지붕 방수재, 댐 코팅재, 파이프 부식 방지재 등 다양한 건설 자재로 쓰입니다. 단순한 도로 재료가 아니라 건설 산업 전반을 떠받치는 소재입니다.


⚙️ 두 번째 행선지 — 윤활유, 움직이는 모든 것의 혈액

감압경유(VGO)는 추가 정제 과정을 거쳐 **윤활기유(Base Oil)**가 됩니다. 여기에 첨가제를 혼합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엔진오일, 기어오일, 그리스(Grease) 등 각종 윤활유가 완성됩니다.

 

윤활유는 마찰을 줄이고 열을 식히며 부품의 부식을 막습니다. 자동차 엔진, 항공기 터빈, 선박 엔진, 공장 기계 — 사람의 혈액처럼, 움직이는 모든 것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글로벌 윤활유 시장은 2025년 기준 약 **1,667억 달러(약 240조 원)**입니다. 2035년까지 2,307억 달러로 성장이 예상됩니다. 한국 시장도 연간 3~4조 원대 규모로 추산됩니다.

 

전기차 시대가 오면 엔진오일 수요가 줄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입니다. 내연기관용 엔진오일 수요는 줄겠지만, 기어박스·냉각 시스템·산업 기계용 윤활유 수요는 유지되거나 오히려 늘어납니다. 윤활유는 엔진만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 세 번째 행선지 — 나프타, 석유화학의 출발점

이제 이 글의 핵심으로 들어갑니다.

나프타→플라스틱 계보도

 

**나프타(Naphtha)**는 분별증류에서 가솔린과 비슷한 온도 대역에서 분리되는 가벼운 탄화수소 혼합물입니다. 자동차 연료로도 일부 사용되지만, 진짜 역할은 따로 있습니다. 나프타는 석유화학 산업 전체의 원료입니다.

 

나프타를 800℃ 이상의 고온 스팀으로 분해하는 공정이 **NCC(Naphtha Cracking Center, 나프타 분해 설비)**입니다. 이 공정에서 나프타는 더 작은 분자로 쪼개지면서 핵심 기초 원료로 변합니다. 대표적인 설비를 기준으로 보면, 나프타 100을 넣었을 때 에틸렌이 약 31%, 프로필렌 16%, C4유분(부타디엔 원료) 10%, 열분해 가솔린(벤젠·톨루엔·자일렌 원료) 14%, 나머지 메탄·수소·LPG 등 29% 수준이 나옵니다.

 

이 숫자들이 왜 중요할까요? 에틸렌, 프로필렌, 부타디엔, 벤젠 — 이 네 가지가 현대 문명을 구성하는 거의 모든 소재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 나프타에서 플라스틱까지 — 에틸렌 하나가 세상을 바꾸다

에틸렌(C₂H₄)은 세상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화학물질 중 하나입니다. 이 작은 분자 하나에서 파생되는 제품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에틸렌을 중합(Polymerization)하면 **폴리에틸렌(PE)**이 됩니다. 비닐봉지, 페트병, 식품 포장재, 파이프, 전선 피복의 원료입니다. 프로필렌을 중합하면 **폴리프로필렌(PP)**이 됩니다. 자동차 내장재, 의료 기기, 식품 용기가 여기서 나옵니다. 에틸렌과 염소를 결합하면 **PVC(폴리염화비닐)**가 됩니다. 창틀, 배관, 바닥재에 쓰입니다. 에틸렌글리콜과 테레프탈산을 반응시키면 PET가 됩니다. 생수병, 섬유, 포장재입니다.

 

부타디엔에서는 **합성고무(SBR)**가 나와 타이어 안으로 들어갑니다. 벤젠에서는 스티렌을 거쳐 **폴리스티렌(PS)**이 되고, 일회용 컵과 단열재가 됩니다. 나일론, 스판덱스, 아크릴 섬유도 모두 이 계보 위에 있습니다.

 

2024년 기준 전 세계 플라스틱 생산량은 **4억 톤을 넘는 수준(4.1~4.3억 톤 구간)**입니다(PlasticsEurope). 글로벌 석유화학 시장은 2025년 7,001억 달러(약 1,011조 원) 규모이며, 2035년 1조 2,575억 달러로 성장이 예상됩니다. 나프타 시장 자체도 2024년 2,670억 달러에서 2034년 3,914억 달러로 확대될 전망입니다.


🏗️ 지금 이 순간 — 에쓰오일 샤힌 프로젝트, 사실상 마무리 단계

이 흐름의 끝에서 오늘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에쓰오일 샤힌 프로젝트

 

에쓰오일(S-OIL)이 울산 온산국가산업단지에서 추진 중인 샤힌(Shaheen) 프로젝트는 국내 석유화학 역사상 최대 단일 투자 사업입니다. 총투자 규모는 9조 2,580억 원이며, 2026년 6월 기계적 완공을 목표로 현재 공정률이 90%대 후반, 사실상 마무리 단계에 와 있습니다(2026년 초 기준 92% 확인).

 

샤힌 프로젝트의 핵심은 스팀 크래커TC2C(Thermal Crude to Chemical) 기술입니다. TC2C는 원유를 직접 석유화학 원료로 전환하는 세계 최초 상용화 기술입니다. 이 설비가 완공되면 에쓰오일은 에틸렌 180만 톤을 포함해 프로필렌·부타디엔·벤젠 등 주요 석유화학 원료를 합산 약 300만 톤 이상 추가 생산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공장 증설이 아닙니다. 휘발유·경유를 파는 정유 회사가 석유화학 원료를 만드는 화학 회사로 전환하는 사업 모델의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에너지 전환 시대, 석유 수요가 줄어드는 미래를 앞두고 원유를 더 높은 부가가치의 화학 소재로 바꾸겠다는 선택입니다.

 

국내 다른 정유사와 석유화학 기업들도 마찬가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최근 중국의 대규모 신규 설비 가동 여파로 한국 석유화학 업황 부진이 이어지고 있어, 업황 회복 시점이 업계 최대의 관심사로 남아 있습니다.


⚠️ 플라스틱 문제 — 편리함의 뒷면

석유화학의 성취를 이야기하면서 그 반대편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연간 4억 톤 이상의 플라스틱이 생산되고, 상당 부분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습니다. 해양 플라스틱 오염이 초래하는 경제적 손실은 연간 수십억~수백억 달러로 추산되며, 건강 피해까지 포함한 플라스틱 관련 전체 사회·경제적 비용은 **연간 1.5조 달러(약 2,175조 원)**에 달한다는 연구도 있습니다(Lancet). 석유화학이 만든 편리함의 외부 비용이 그만큼 크다는 의미입니다.

 

이 문제에 대응하는 흐름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EU의 재활용 의무 비율 강화, 글로벌 플라스틱 조약 논의, 바이오 기반 플라스틱과 화학적 재활용 투자 확대 — 석유화학 기업들 스스로도 이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 오십보의 시선 — 투자 포인트 정리

석유 심화 3편에서 오늘 살펴본 흐름을 투자 시각으로 정리하면 세 가지입니다.

 

첫째, 잔사유 → 아스팔트·윤활유 라인은 인프라 투자와 산업 기계 수요에 연동됩니다. 도로 건설이 활발한 신흥국 성장이 핵심 변수입니다.

 

둘째, 나프타 → 에틸렌 → 플라스틱 라인은 나프타 크래킹 스프레드(에틸렌 가격 - 나프타 가격), 중국 신규 설비 가동 일정, 그리고 글로벌 플라스틱 규제 강도가 핵심 지표입니다. 지금 한국 석유화학 업체들의 실적 부진도 중국발 공급 과잉이 주된 이유입니다.

 

셋째, 에쓰오일 샤힌 프로젝트는 2026년 하반기 상업 가동이 시작되면 에쓰오일의 수익 구조가 크게 바뀝니다. 정유 마진의 변동성을 석유화학 마진으로 일부 상쇄할 수 있는 구조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가동 초기 스타트업 비용과 업황 회복 시점이 투자 판단의 핵심 변수입니다.

 

관찰 지표 의미

나프타 크래킹 스프레드 (에틸렌 - 나프타 가격) NCC 수익성 방향
중국 에틸렌 신규 설비 가동 일정 한국 석유화학 업황 압박 여부
에쓰오일 샤힌 프로젝트 상업 가동 시점 에쓰오일 실적 구조 전환 신호
글로벌 플라스틱 규제 강도 장기 석유화학 수요 변화

4편 예고

석유 없는 세상은 가능한가? 에너지 전환, 수소, 그리고 정유사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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