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의 식탁 | 밀의 경제학 6편] 밀값이 내려가도 라면값이 안 내려가는 이유 — 원가 하락이 소비자 가격으로 이어지지 않는 구조
[밀의 경제학 6편] 밀값이 내려가도 라면값이 안 내려가는 이유 — 원가 하락이 소비자 가격으로 이어지지 않는 구조
밀값은 내렸다. 라면값은 그대로였다
2022년 3월,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진 직후 국제 밀 가격은 부셸당 13달러를 넘어섰습니다. 150년 시카고 선물 거래 역사에서 손꼽히는 고점이었습니다. 그 충격이 그대로 소비자 가격으로 전달됐고, 라면 가격은 잇따라 올랐습니다.

그런데 이후 밀값은 다시 내려갔습니다. 2024년에는 부셸당 5달러대까지 떨어졌습니다. 이쯤 되면 라면값도 내려야 하지 않을까요?
2026년 4월 1일부터 농심·오뚜기·삼양식품·팔도가 드디어 라면 가격을 내렸습니다. 2023년 6월 이후 약 2년 9개월 만이었습니다. 41개 제품, 평균 4.8~14.6% 인하. 그런데 중요한 대목이 있습니다. 농심의 신라면과 짜파게티, 삼양식품의 불닭볶음면, 오뚜기의 진라면은 인하 대상에서 제외됐습니다. 각 회사 매출 1위 제품들입니다.
밀값이 반토막 나는 데 걸린 시간은 약 2년. 라면 가격 일부가 내려가는 데 걸린 시간도 약 2년 9개월. 그런데 올라갈 때는 몇 달 안에 반영됐습니다. 이 비대칭이 오늘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가격은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계단이다
경제학에서는 이 현상을 **비대칭적 가격전이(Asymmetric Price Transmission)**라고 부릅니다. 원가가 오를 때 소비자 가격은 빠르게 올라가지만, 원가가 내릴 때 소비자 가격은 천천히, 혹은 일부만 내려가는 현상입니다. 올라가는 건 엘리베이터, 내려가는 건 계단이라는 비유도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기업 입장에서는 구조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원가는 밀 하나가 아닙니다. 라면 한 봉지에는 밀가루 외에도 팜유·간장·스프 원료·포장재·에너지 비용·물류비·마케팅비가 모두 들어갑니다. 라면 제조원가에서 밀가루가 차지하는 비율은 약 10% 수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국제 밀 가격이 반토막 나도 밀가루 비용 절감 효과는 전체 원가의 5% 안팎에 그칩니다. 나머지 원가들이 함께 내려가지 않으면 가격을 내리기 어렵다는 게 업계의 논리입니다.

둘째, 올릴 때 이미 충분히 올렸을 수 있습니다. 기업은 가격을 올릴 때 현재 원가뿐 아니라 미래 원가 상승까지 선반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 내릴 때는 다음 상승 가능성을 이유로 유보합니다.
셋째, 경쟁이 충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라면 시장은 농심·오뚜기·삼양식품·팔도 네 회사가 시장을 나눠 갖는 과점 구조입니다. 치열한 가격 경쟁이 없으면 원가 하락이 소비자에게 전달되는 속도가 느려집니다.
담합이 있었다 — 보조금까지 받으면서
그런데 2026년 5월 20일, 이 이야기에 새로운 챕터가 추가됐습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대한제분·CJ제일제당·사조동아원·삼양사·대선제분·삼화제분·한탑 등 7개 제분사의 밀가루 공급가격 및 공급 물량 담합 행위에 대해 총 6,710억 4,500만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습니다. 담합 사건 사상 역대 최대 규모입니다.
이들 업체는 2019년 11월부터 2025년 10월까지 총 24차례에 걸쳐 가격 인상·인하 폭과 시기, 거래처별 공급 물량 등을 합의했습니다. 이 기간 담합한 시장 규모는 5조 6,900억 원에 달합니다.

담합이 촉발된 경위도 구체적입니다. 2018년 말 대한제분이 농심 입찰에서 경쟁사보다 낮은 가격을 제시해 물량의 약 30%를 확보하면서 업계 경쟁이 격화됐고, 이를 계기로 상위 3개사가 과도한 경쟁을 자제하고 적정 가격을 유지하자는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담합이 시작됐습니다.
가장 충격적인 대목은 따로 있습니다. 이들은 정부로부터 물가 안정 보조금 471억 원을 지원받는 중에도 담합 행위를 반복했습니다. 물가를 잡으라고 세금으로 지원한 돈을 받으면서 뒤로는 가격을 담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담합 결과로 2022년 9월경 밀가루 판매 가격은 담합 초기인 2019년 12월 대비 업체별로 최소 약 38%에서 최대 74%까지 급등했습니다.
핵심 구조는 이렇습니다. 제분사들은 원맥 가격이 오를 때는 즉각 판매가에 반영하고, 내릴 때는 최대한 늦추는 방식으로 폭리를 취했습니다. 라면 회사 입장에서는 원재료인 밀가루가 비쌌으니 라면 가격을 내리기 어렵다고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 밀가루 가격이 담합으로 인위적으로 높게 유지되고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국제 밀값 하락의 혜택은 제분사와 라면 회사의 마진 속에 묻혔고, 소비자 식탁까지 내려오는 데 수년이 걸렸습니다.
정부가 개입했다 — 압박이 만든 인하
이번 라면 가격 인하의 배경에는 원가 하락 외에 정부의 연쇄적인 개입이 있었습니다.

공정위는 2026년 2월 제당 3사(CJ제일제당·삼양사·대한제당)의 담합을 적발해 4,000억 원대 과징금을 부과했습니다. 이후 설탕 가격이 4~6% 인하됐습니다. 이어 제분사 7개 업체에 대한 밀가루 담합 심사보고서를 발송하자 밀가루 가격도 4~6% 하락했습니다. 설탕·밀가루 원재료가 내려가자 정부는 라면 회사들을 압박했고, 농식품부가 라면 4사 임원들을 불러 간담회를 열었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설탕값은 16.5% 내렸는데 설탕을 쓰는 상품은 가격을 그대로 유지하면 안 된다"고 발언하며 기업들의 동참을 압박했습니다.
그 결과가 4월 1일부터의 라면 가격 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시장의 자율적 경쟁이 아닌, 정부 압박이 만들어낸 인하라는 점에서 근본 구조가 해결됐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리드플레이션이라는 말
이 상황을 설명하는 또 다른 개념이 있습니다. **그리드플레이션(Greedflation)**입니다. '탐욕(Greed)'과 '인플레이션(Inflation)'을 합친 신조어로, 기업이 물가 상승을 명분으로 원가 이상의 가격 인상을 통해 이익을 극대화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그렇다고 기업을 단순히 탐욕스럽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기업은 이익을 추구하는 조직이고, 경쟁이 충분하다면 가격은 자연스럽게 내려갑니다. 문제는 경쟁이 부족하거나, 담합이 있거나, 정보 비대칭이 심할 때입니다. 이번 밀가루 시장에서는 세 가지가 모두 작동했습니다.
소비자가 알아야 할 것
오십보가 이 시리즈를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하나입니다. 슈퍼마켓 진열대 위의 가격은 원재료 원가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카고 선물시장의 밀 가격이 내려갈 때, 그 신호가 내 식탁까지 오려면 제분사, 라면 회사, 유통 구조, 경쟁 환경, 그리고 규제 시스템이라는 여러 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어느 한 곳에서 가격이 막히면 소비자는 혜택을 받지 못합니다.
이번 밀가루 담합 사건이 보여준 것처럼, 공정위의 역할이 바로 그 관문이 제대로 열려 있는지를 감시하는 일입니다. 6,710억이라는 과징금은 숫자 이상의 신호입니다. 원가가 내려갈 때 가격도 내려야 한다는, 시장이 스스로 지켜야 할 원칙에 대한 경고입니다.
밀의 경제학, 앞으로 두 편
이 시리즈는 두 편을 더 쓰고 마무리합니다.
7편에서는 한국이 밀을 거의 기르지 못하면서도 라면 수출 강국이 된 역설을 들여다볼 예정입니다. 자급률 2%의 나라가 어떻게 세계 라면 시장을 점령하게 됐는지, K-라면의 경제학을 읽겠습니다.
8편에서는 밀의 경제학 전체를 정리하며, 식량 안보라는 더 큰 질문으로 나아가겠습니다. 밀 하나를 따라가다 결국 우리가 도달하는 곳은 어디인지를 함께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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