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의 경제학 2편] 홈플러스의 28년 — 삼성이 낳고, 테스코가 키우고, 사모펀드가 흔든 마트 이야기
[마트의 경제학 2편] 홈플러스의 28년 — 삼성이 낳고, 테스코가 키우고, 사모펀드가 흔든 마트 이야기
안녕하세요, 오십보입니다.
1편에서 월마트와 까르푸가 한국에서 어떻게 실패했는지 읽었습니다. 오늘은 그 실패들이 남긴 공백을 채우며 성장했다가, 전혀 다른 이유로 벼랑 끝까지 몰렸던 홈플러스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삼성물산도 나오고, 영국 테스코도 나오고, 아시아 최대 사모펀드 MBK파트너스도 나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지금, 홈플러스는 실제로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이틀 전인 8월 13일, 전국 67개 점포가 정식으로 재개장하며 매장마다 오픈런 인파가 몰렸습니다.
외국계가 현지화에 실패해 한국을 떠난 이야기와 달리, 홈플러스의 이야기는 다른 종류의 실패입니다. 사람의 문제라기보다 구조의 문제, 돈의 문제입니다.
1997년 대구 — 삼성홈플러스 1호점이 열리던 날
1997년 9월. 삼성물산 유통부문이 대구에 첫 번째 할인매장 '삼성홈플러스'를 열었습니다. 당시 삼성은 이마트의 성공을 보며 직접 뛰어들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타이밍이 좋지 않았습니다. 매장 문을 연 직후 IMF 외환위기가 터졌습니다. 유통 사업은 삼성의 본업이 아니었고, 덩치가 큰 할인마트를 운영하는 데는 막대한 현금이 필요했습니다.
1999년, 삼성물산은 영국 테스코와 손잡고 합작법인 '삼성테스코'를 설립했습니다. 이후 테스코는 단계적으로 지분을 늘려 나갔고, 이름도 삼성테스코 → 테스코홈플러스 → 홈플러스로 바꿔 나갔습니다.

테스코가 들어온 것은 나쁜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테스코는 영국 최대 슈퍼마켓이었고, 글로벌 운영 경험이 풍부했습니다. 무엇보다 테스코는 월마트·까르푸와 달리 현지화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외국인 임원 대신 한국인 사장과 점장을 임명했고, 테스코라는 이름 대신 고유 이름 홈플러스를 앞세웠습니다.
결과적으로 2000년대 홈플러스는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전국 매장을 140여 개까지 늘리며 이마트와 업계 1위 자리를 다퉜습니다. 홈플러스는 한국 대형마트 3강 구도를 만든 주역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복합적인 소유 구조 변화를 겪은 기업이기도 했습니다.
2011년의 전환점 — 회원 정보 유출 사건
성장에 그늘이 생긴 것은 2011년이었습니다. 홈플러스가 경품 행사 등을 통해 수집한 고객 개인정보를 보험사에 팔았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한국 사회가 뒤집혔습니다. 이 사건은 홈플러스의 브랜드 이미지에 지울 수 없는 흠집을 남겼습니다.
2015년, 7조 2,000억 원의 거래 — 테스코가 떠난 이유
테스코가 홈플러스를 판 것은 한국 사업이 싫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영국 본사에 위기가 왔기 때문입니다. 테스코는 2014년 회계 조작 스캔들이 터졌고, 그로 인한 재무 손실을 메우기 위해 전 세계 자산을 팔아야 했습니다. 홈플러스는 테스코의 해외 자산 중 가장 알짜였습니다.
매물로 나온 홈플러스를 KKR·어피니티 컨소시엄 등 여러 경쟁자를 제치고 MBK파트너스가 가져갔습니다. 매각 금액은 약 7조 2,000억 원. 당시 국내 M&A 사상 최대 규모였습니다. 테스코는 이 매각으로 16년간의 로열티·배당금을 포함해 4조~5조 원의 이익을 거두고 한국을 떠난 것으로 분석됩니다.
MBK파트너스는 사모펀드(Private Equity Fund)입니다. 사모펀드의 논리는 단순합니다. 기업을 사서 가치를 높인 뒤, 더 높은 가격에 팔아 수익을 냅니다. 통상 5~7년을 보유 기간으로 잡습니다.

그런데 인수 방식에서 이미 경고등이 켜져 있었습니다. 7조 2,000억 원 중 상당 부분을 외부 차입으로 충당하는 레버리지드 바이아웃(LBO, Leveraged Buyout) 방식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빌린 돈으로 기업을 사고, 그 빚을 산 기업의 자산과 수익으로 갚는 구조입니다. 기업이 잘 돌아가면 문제없지만, 수익이 줄기 시작하면 빚이 발목을 잡습니다. 이 인수는 훗날 한국 M&A 역사상 대표적인 '승자의 저주' 사례로 회자됩니다.
"알짜 점포를 팔아 빚을 갚다"
MBK가 홈플러스를 인수한 이후 선택한 방법은 자산 매각이었습니다.
홈플러스가 직접 소유하던 알짜 점포들을 팔고, 팔린 점포를 다시 임차해서 사용하는 세일&리스백(Sale & Leaseback) 방식이었습니다. 한번에 큰 현금을 확보할 수 있지만, 이후 매달 임차료가 나갑니다.
2016년부터 2024년까지 이런 방식으로 유입된 현금이 약 4조 1,216억 원에 달합니다. 이 돈은 대부분 인수 때 빌린 빚과 이자(누적 약 2조 6,000억 원 규모로 알려짐)를 갚는 데 쓰였습니다. MBK의 문제는 단순한 '자산 매각' 자체가 아니라, 점포를 팔아 현금을 만드는 방식이 본업 경쟁력 강화 없이 지속됐다는 데 있습니다.
오프라인 유통업은 자산을 줄이면 체력이 약해지고, 체력이 약해지면 온라인 경쟁에서 더 밀립니다. 2010년대 중반부터 쿠팡이 본격적으로 성장했습니다. 새벽 배송, 당일 배송. 코로나19는 온라인 장보기를 습관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마트는 SSG닷컴·스타필드·새벽 배송으로 대응했지만, 홈플러스는 빚 갚기에 여력을 쓰며 변화에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2025년 기업회생 신청, 그리고 2026년 여름의 롤러코스터
2025년 3월, 홈플러스는 서울회생법원에 기업회생 절차를 신청했습니다. 신청 당시 총 차입금은 5조 4,620억 원, 부채비율은 1,408%에 달했습니다.

2026년 7월 3일, 서울회생법원은 운영자금 부족을 이유로 일단 홈플러스의 회생절차 폐지를 결정했습니다. 회생계획을 수행할 최소 자금인 2,000억 원 확보 방안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여파로 7월 13일부터 전국 67개 핵심 점포가 전면 휴업에 들어갔습니다. 협력업체에 밀린 공익채권(급여·물품대금)이 7,000억 원을 넘어서면서, 상품을 공급받지 못한 매장은 텅 비었습니다.
다만 법원은 폐지 결정을 내리면서도 단서를 하나 달아 두었습니다. 2,000억 원의 긴급운영자금을 조달해 항고한다면 다시 검토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홈플러스의 최대 채권자인 메리츠금융그룹이 여기에 응답했습니다. 대주주 MBK파트너스 김병주 회장의 개인 연대보증을 조건으로, 메리츠화재·증권·캐피탈이 긴급운영자금(DIP) 2,000억 원 지원을 승인했습니다.
이를 근거로 홈플러스가 제기한 즉시항고를, 7월 21일 서울회생법원이 받아들였습니다. 회생절차 폐지 결정은 취소됐고, 회생계획안 가결 기한은 9월 4일까지 연장됐습니다. 다만 이번이 법적으로 가능한 마지막 연장입니다. 9월 4일 관계인 집회에서 회생계획안이 가결되지 않으면, 그 즉시 파산 절차로 넘어갑니다.

8월 13일, 홈플러스가 다시 문을 열었다
이 글을 쓰는 2026년 8월 15일 현재, 홈플러스는 실제로 다시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긴급운영자금이 집행되면서, 홈플러스는 8월 7일 67개 핵심 점포의 문을 먼저 부분적으로 열었습니다. 이 '가오픈' 기간에는 상품 진열과 공급 상황, 매장 운영 시스템을 점검하는 데 집중했고, 개장 직전 기준 상품 입고율은 약 30% 수준에 그쳤습니다.
그리고 8월 13일, 67개 점포 전체가 신선식품과 식료품을 중심으로 정식 재개장했습니다. 결과는 예상보다 뜨거웠습니다. 서울 강서점을 비롯한 전국 매장에 개장 전부터 손님이 몰렸고, 강서점에는 200여 명이 문 열기 전부터 줄을 서서 매장에 준비된 쇼핑카트가 동날 정도였습니다. "홈플러스가 없어져서 불편한 점이 많았다", "여기가 아니면 다른 데까지 가야 하는데 가까운 매장이 없다"는 반응이 현장 인터뷰에서 이어졌습니다. 재개장을 기념해 한우 전 품목 최대 50% 할인, 대표 델리 상품인 '당당후라이드치킨' 반값 판매 같은 행사도 함께 진행됐습니다.
온라인 배송도 뒤따랐습니다. 67개 점포 중 59곳에서 온라인몰 영업이 함께 재개됐습니다.
다시 여는 홈플러스는 예전의 홈플러스가 아닙니다. 회사는 기존 복층 매장의 영업 공간을 줄이고, 식품·자체브랜드(PB) 상품과 회전율 높은 생필품 위주로 운영을 재편하겠다는 방침을 밝혔습니다. 업계에서는 이 모델을 미국의 창고형 유통업체 '트레이더 조(Trader Joe's)'에 비유합니다. 비식품 부문을 줄이고 마진율 높은 상품에 집중해 수익성을 끌어올리겠다는 전략입니다.
회생 절차 신청 당시 있었던 매장 중 37개는 이번에 문을 닫았고, 해당 매장 직원들에게는 다른 점포로의 전환배치가 이뤄졌습니다.
재개장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다만 8월 13일의 오픈런이 곧 '위기 종료'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정치권과 노사 모두 "완전한 정상화로 보답하겠다"는 메시지를 냈지만, 정작 회생계획안이 최종 가결되려면 9월 4일 관계인 집회에서 주요 채권자들의 동의를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판단의 핵심 근거가 바로 지금부터 9월 4일까지의 실제 매출과 정상화 속도입니다.

한 입점 상인의 말이 지금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가오픈 당시엔 "다시 문을 연다고 매출이 갑자기 늘지는 않겠지만, 캄캄하게 닫혀 있는 것보다는 낫다"고 담담하게 말했던 이 상인은, 정식 개장 이후 엿새 만에 다시 만났을 때는 한층 밝아진 표정이었다고 전해집니다. 2,000억 원의 긴급운영자금으로 매대는 다시 채워졌지만, 이 안정성이 3주 안에 얼마나 굳어질 수 있을지는 아직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빈자리는 누가 채우나 — 한국 유통 지도의 재편
홈플러스가 흔들리는 사이, 이마트는 오히려 반사이익을 누렸습니다. 스타필드 마켓으로 새단장한 일산점은 매출이 전년 대비 75% 넘게 뛰었고, 방문 고객 수는 두 배 넘게 늘었습니다. 트레이더스와 조선호텔 사업의 성장에 힘입어 이마트는 2026년 1분기, 14년 만에 최대 영업이익을 냈습니다.
전문가들의 분석은 냉정합니다. 홈플러스를 떠난 고객 상당수가 인근 대형마트로 옮겨가기보다, 쿠팡·컬리 같은 온라인 채널과 편의점, 식자재마트, 그리고 인근 재래시장으로 흩어졌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홈플러스가 문을 닫았던 몇 주 동안 목동의 재래시장이나 이마트를 대신 찾았다는 고객들의 이야기도 재개장 현장에서 확인됐습니다.
오십보의 정리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이 이야기는 "홈플러스가 문을 닫는다"로 끝날 뻔했습니다. 지금은 다시 문을 열었고, 손님들이 줄을 서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그 문이 계속 열려 있을지는 여전히 9월 4일 관계인 집회 결과에 달려 있습니다.
여기엔 두 가지 관점이 함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모펀드와 유통 기업의 결합 문제입니다. 사모펀드는 5~7년 안에 수익을 내야 하는 구조인데, 유통업은 10년, 20년을 내다보는 인프라 투자가 필요한 업종입니다. 점포를 팔아 빚을 갚는 동안, 경쟁사들은 물류 센터를 짓고 앱을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방향이 달랐습니다.
두 번째는 오프라인 유통의 생존 방식 자체가 바뀌고 있다는 점입니다. 홈플러스가 선택한 길은 "모든 것을 파는 대형마트"를 포기하고, "잘 팔리는 것만 압축해서 파는 식품 매장"으로 몸을 줄이는 것이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정체성 자체를 바꾼 셈입니다.
직원 약 1만 2,000명과 협력업체 수백 곳의 삶은 여전히 9월 4일 결과에 달려 있습니다. 매장 문은 다시 열렸고 손님도 돌아왔지만, 이 온기가 회생계획안 가결로 이어질지는 아직 지켜봐야 합니다. 홈플러스 이야기는 정말로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한 걸음, 오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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