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의 경제학 4편] 전통시장의 생존법 — 가장 오래된 유통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만났을 때
[마트의 경제학 4편] 전통시장의 생존법 — 가장 오래된 유통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만났을 때
안녕하세요, 오십보입니다.

1편부터 3편까지 우리가 다룬 이야기는 사실 꽤 좁은 무대 위의 싸움이었습니다. 대형마트끼리, 외국 자본과 국내 자본끼리, 누가 더 넓은 주차장과 더 낮은 가격을 내놓느냐의 경쟁이었죠. 그런데 그 싸움이 한창이던 1990년대, 무대 바깥 어딘가에는 전혀 다른 종류의 유통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전통시장, 흔히 말하는 재래시장입니다.
1편에서 이마트 창동점이 문을 연 첫날 약 2만 6,800명이 몰렸다는 이야기를 잠깐 짚었습니다. 그 인파는 어디서 왔을까요. 백화점에서 온 사람도 있었겠지만, 상당수는 그때까지 동네 재래시장에서 장을 보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오늘은 그 이후 30년, 전통시장이 어떻게 버텨왔는지를 읽어보겠습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전통시장의 생존 방정식은 이마트나 홈플러스의 그것과 결이 완전히 다릅니다. 규모의 경제는 포기했습니다. 대신 선택한 건 정부 지원, 조금은 서툴렀던 디지털 실험, 그리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어온 바람이었습니다.
30년 쇠퇴사 — 대형마트만의 탓은 아니다
전통시장이 흔들리기 시작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이마트 1호점이 생기기 전까지, 한국의 유통은 대체로 두 갈래였습니다. 공산품은 백화점에서, 신선식품과 생필품은 재래시장에서. 이 균형은 대형마트의 등장과 함께 빠르게 무너졌습니다.
대형마트는 단순히 싼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신선식품과 공산품을 한 지붕 아래 갖추고, 넓은 주차장에, 정돈된 환경까지 — 재래시장이 갖지 못한 것들을 한 번에 제공했습니다. 전통시장 연매출은 2005년 32조 7,000억 원대로 정점을 찍은 뒤 오랫동안 내리막을 걸었습니다.
다만 이 쇠퇴를 전부 대형마트 탓으로 돌리는 건 반쪽짜리 진단입니다. 대형마트 의무휴업 규제와 관련한 여러 분석을 보면, 의무휴업일에 소비자들이 전통시장이 아니라 온라인몰로 옮겨가는 경향이 뚜렷하다는 지적이 꾸준히 나옵니다. 전통시장의 진짜 경쟁 상대는 대형마트 하나가 아니라, 소비 패턴 자체의 변화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대형마트 규제의 경제학은 다음 시리즈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겠습니다.)
카드는 이미 잘 된다 — 문제는 그다음 단계
전통시장 하면 "카드가 잘 안 된다"는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정반대에 가깝습니다.

여러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국 전통시장의 신용카드 결제 비율은 2020년대 초 70%대에서 최근에는 90%에 가까운 수준까지 올라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 전체 소비지출 중 카드 결제 비중이 약 78% 수준이라는 점과 비교하면, 전통시장의 카드 결제 비중이 오히려 한국 평균과 비슷하거나 더 높은 셈입니다. 정부도 전통시장 카드 사용분에 대한 소득공제율을 일반 카드보다 두 배 가까이 높게 적용하며 이 흐름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 단계입니다. 카드는 잘 되는데, 온라인·모바일로의 확장은 아직 더딥니다. 전통시장의 온라인몰 운영 비율은 여전히 한 자릿수 초반대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다시 말해 "전통시장은 결제가 안 된다"가 아니라 "결제는 되는데 온라인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정확한 진단에 가깝습니다. 오프라인 카드 결제라는 1단계 현대화는 이미 끝났고, 다음 10년의 과제는 이 결제 인프라를 온라인·모바일 장보기 경험과 어떻게 엮어내느냐입니다.
냉난방과 동선 — 가장 기본적인데 가장 뒤처진 인프라
카드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냉난방입니다.

전국 전통시장 중 냉방시설을 갖춘 곳은 30% 안팎에 그치는 것으로 조사됩니다. 지붕이 있는 실내형 시장으로 좁혀 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셋 중 한 곳꼴로 에어컨 없이 여름을 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폭염이 일상이 된 요즘, 한낮에 손님이 카페와 쇼핑몰로 몰리고 시장이 비는 현상은 어쩌면 '가격'이 아니라 '온도'의 경쟁에서 이미 승부가 난 결과일지 모릅니다.
정부는 쿨링포그나 이동식 냉풍기 같은 임시방편을 일부 시장에 지원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냉난방 설비 확충에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상품권이나 홍보 행사보다, 기본적인 냉난방 같은 '생존 인프라'에 예산을 먼저 배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동선 문제도 비슷합니다. 대형마트는 카트와 엘리베이터를 기준으로 설계된 공간입니다. 전통시장은 그렇지 않습니다. 통로가 좁고 노점이 동선을 가리는 경우가 많고, 카트 자체가 없거나 있어도 계단·경사로 때문에 쓰기 어려운 곳이 많습니다. 냉난방과 마찬가지로, 카트가 다닐 수 있는 통로 폭과 경사로, 휠체어로 접근 가능한 화장실 같은 '기초 설계 기준'을 시장 현대화 지원의 최소 조건으로 삼아야 한다는 제안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편의 문제를 넘어, 고령화 시대에 시장을 계속 찾는 어르신들과 장애인 접근성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온누리상품권 — 정부가 인위적으로 만든 수요
쪼그라드는 전통시장을 살리기 위해 정부가 꺼낸 대표적 카드가 온누리상품권입니다. 2009년 도입된 이 제도는 전통시장에서만 쓸 수 있는 상품권을 할인가에 판매해, 소비자에게는 혜택을, 상인에게는 매출을 주는 방식입니다.

발행 규모는 매년 커져서 최근에는 연간 5조 원대 규모까지 확대됐습니다. 실증 연구들을 보면 온누리상품권 취급 비율이 높은 점포일수록 매출이 눈에 띄게 늘어난다는 분석이 있고, 2024년 전통시장 연매출이 2005년 이후 처음으로 30조 원을 다시 넘어선 데도 이 상품권 정책이 어느 정도 기여했다는 게 업계의 대체적인 시각입니다.
다만 그림자도 있습니다. 상품권 할인으로 온 손님이 진짜 단골이 되는지는 연구마다 결론이 엇갈립니다. 상품권이 없으면 발길을 끊는 '행사 쇼핑족'이 적지 않다는 지적도 있고, 지류 상품권을 중심으로 한 부정 유통 문제도 꾸준히 제기됩니다. 온누리상품권은 단비였지만, 그 단비가 뿌리를 깊게 내리게 했는지는 여전히 물음표입니다.
청년몰 — 희망과 좌절 사이
온누리상품권이 기존 상인을 직접 지원하는 방식이었다면, 청년몰은 전통시장 자체를 바꿔보려는 시도였습니다. 2013년 전주 남부시장에서 시작된 이 사업은, 비어가는 시장 2층이나 구석 공간에 청년 창업자를 유치해 새로운 콘텐츠로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구상이었습니다.

초기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전주 남부시장 청년몰이 화제가 되면서 1층 기존 상가 매출까지 함께 오르는 효과가 보고됐고, 이후 전국 40여 개 전통시장으로 확산됐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결과는 씁쓸한 편입니다. 전국 청년몰 상당수가 이미 문을 닫았거나, 남은 곳도 평균 공실률이 30~40%대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공간을 만들면 손님이 온다'는 전제 자체가 안일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시장 자체에 유동인구가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2층에 새 콘텐츠를 채워 넣어도 손님이 갑자기 늘지 않았고, 정부 지원금이 끝나는 시점(보통 3년 전후)이 되면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떠나는 청년들도 많았습니다. 다만 자체 콘텐츠 경쟁력으로 10년 이상 버티며 시장의 상징이 된 점포들도 있어, 성패를 가른 건 결국 독립적인 상품력이었다는 평가입니다.
디지털 접목 — 진지하지만 아직 절반의 성공
전통시장과 디지털이라는 조합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2010년대 중반부터 꽤 진지한 실험들이 이어져 왔습니다.
전통시장 상품을 앱으로 주문받아 근거리 배달해주는 서비스들이 일부 지역 시장에 도입됐고, 포털의 '동네시장 장보기' 같은 서비스가 지역 시장과 연계해 온라인 매출 창구를 열기도 했습니다. 정부도 디지털 결제·스마트 인프라 보급 사업을 통해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다만 냉정하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배달 앱이나 온라인 플랫폼 입점이 실질적인 매출 증가로 이어졌는지에 대한 명확한 전국 단위 통계는 아직 부족합니다. 배달 수수료 부담이 적지 않고, 평균 연령이 높은 상인들에게는 재고와 메뉴를 디지털화하는 작업 자체가 진입장벽이 되기도 합니다. 기술이 먼저 와 있고, 사람이 따라오기를 기다리는 형국에 가깝습니다.
예상 밖의 반전 — MZ세대와 외국인 관광객
여기서 흥미로운 최근 현상을 짚어야 합니다. 정부 정책도, 청년몰도, 디지털화도 아닌 곳에서 전통시장에 새 바람이 불었습니다. 바로 MZ세대와 외국인 관광객입니다.

서울 전통시장 방문객 연령대를 보면 20대 이하 비중이 60대 이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앞서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광장시장을 향한 해외의 관심도 최근 몇 년 사이 눈에 띄게 커졌습니다.
이들이 시장으로 간 이유는 장보기가 아니었습니다. 서울 용산 해방촌 신흥시장에는 다국적 음식점이 들어서 주말이면 긴 줄이 서고, 동묘 구제시장은 외국인 관광객의 '초저가 쇼핑' 성지가 됐습니다. 광장시장에는 뷰티 편집숍과 몇몇 MZ 패션 브랜드가 매장을 내는 등, 전통시장에 어울리지 않던 브랜드들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카드사 소비 데이터를 봐도 전통시장 매출 증가를 이끈 항목은 식재료가 아니라 가공식품·커피음료·분식간식 같은 품목이라는 분석이 있습니다. 시장이 '장보기 공간'에서 '먹고 노는 공간'으로 기능 자체가 바뀌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이건 정책으로 만들어진 변화가 아닙니다. 한류 콘텐츠를 타고 온 외국인 관광객이 '진짜 한국'을 찾아 시장으로 향하고, 이를 SNS로 접한 MZ세대가 뒤따르고, 브랜드들이 그 유동인구를 노려 입점하는 선순환이 만들어졌습니다. 시장이 살아남았다기보다, 전혀 다른 시장으로 진화한 셈입니다.
동아시아 3국, 그리고 유럽 — 재래시장은 나라마다 다른 답을 찾았다
한국 전통시장을 이웃 나라와 나란히 놓아보면 흥미로운 대조가 보입니다.

한국은 결제·디지털 인프라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앞서 있으면서도, 냉난방 같은 물리적 시설은 가장 뒤처져 있는 역전된 구조입니다. "카드는 최첨단, 공간은 여전히 옛날식"이라는 표현이 어울립니다.
일본의 오사카 구로몬시장이나 덴진바시스지 같은 상점가는 정반대에 가깝습니다. 긴 아케이드 지붕으로 비·눈·햇빛을 차단해 사계절 쾌적하게 걸을 수 있도록 설계돼 있고, 상인조합이 주도하는 축제·이벤트로 손님을 꾸준히 끌어옵니다. 다만 결제의 디지털화는 한국보다 느린 편이어서, "시설은 선진적, 결제는 아직 현금 중심"이라는 정반대의 그림이 나타납니다. 한국이 배워올 수 있는 지점은 냉난방보다 근본적인, '아케이드형 생활권 인프라'라는 접근입니다.
대만의 스린·라오허 같은 야시장은 냉난방으로 기후에 맞서는 대신, 아예 해가 진 뒤 시간대로 옮겨가 '밤 문화·먹거리 콘텐츠'로 승부를 봤습니다. 낮의 더위를 피해 밤에 몰리는 이 방식은, 한국의 MZ·관광지화 흐름과 가장 닮은 진화 방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규모와 밀도 면에서는 대만이 한국보다 훨씬 큽니다.
유럽의 바르셀로나 보케리아나 런던 버로우 마켓 같은 오래된 시장들은 아예 완전한 실내형 건축과 냉난방을 갖추고, '시장 더하기 관광 더하기 외식'이라는 복합 공간으로 재정의됐습니다. 한국의 광장시장·통인시장도 이 모델을 점점 닮아가고 있지만, 시설·위생 기준에서는 여전히 격차가 있습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한국 전통시장이 나아갈 방향은 세 갈래로 정리됩니다. 일본처럼 기후·동선 인프라를 생활권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 대만처럼 콘텐츠와 시간대를 재설계하는 것, 그리고 이미 갖춘 강점인 카드·디지털 결제를 공간 경험과 잘 엮어내는 것입니다. 가장 비슷한 진화 방향은 대만(관광·먹거리 콘텐츠화)이고, 가장 대조적인 지점은 일본(결제는 느리지만 시설은 선진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십보의 정리
1편에서 월마트가 한국에서 짐을 쌌던 이야기를, 3편에서 이마트가 트레이더스와 복합 유통으로 반격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이 두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결국 규모의 경제로 싸우는 선수들이었습니다. 더 넓게, 더 싸게, 더 많이.
전통시장은 처음부터 그 경기에 낄 수 없었습니다. 소자본 상인들이 흩어져 있는 구조, 통일된 브랜드도 물류 시스템도 없는 구조로는 대형마트와 가격으로 경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전통시장의 생존 전략은 아예 다른 방향으로 갔습니다. 경쟁하는 대신, 다른 것이 되기로 한 것입니다. 국가가 수요를 인위적으로 만들어주는 온누리상품권, 낡은 공간을 청년의 콘텐츠로 채우려 한 청년몰, 스마트폰으로 주문받는 디지털화 — 성패는 엇갈렸지만 방향은 같았습니다. 그리고 최근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신호는, 전통시장의 '낡음' 그 자체가 콘텐츠가 됐다는 사실입니다. 레트로 감성, 우연한 발견의 재미, 덤과 흥정의 문화 — 대형마트와 이커머스가 절대 줄 수 없는 것들입니다.
물론 현실은 여전히 녹록지 않습니다. 매출이 늘어도 방문객 수는 줄어드는 해가 있었다는 통계는, 자주 오는 손님이 늘어난 게 아니라 적게 오는 손님이 더 비싸게 쓰고 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상인들의 평균 연령도 계속 높아지고 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이 숫자들의 무게는 더 커질 것입니다.
전통시장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카드는 이미 현대화됐고, 냉난방과 동선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숙제가 남아 있습니다. 이 싸움이 어디서, 어떻게 마무리될지는 다음 세대 상인들이 써 내려갈 이야기입니다.
오늘도 한 걸음, 오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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