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경제 10편] 뉴욕 로어이스트사이드 — 이민자의 가방에서 백화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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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러시아 오데사에서 한 청년이 배에 올랐습니다. 품속에는 바늘과 실 몇 묶음, 그리고 작은 천 조각들이 든 보따리 하나. 영어는 한 마디도 몰랐고, 아는 사람이라고는 3년 전 먼저 떠난 사촌의 주소 하나뿐이었습니다. 배가 뉴욕항에 들어서던 날, 그가 처음 본 것은 자유의 여신상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스 섬 입국 심사관이 내민 서류와, 그 뒤로 펼쳐진 맨해튼의 낯선 스카이라인이었습니다.
그 청년이 내린 곳이 바로 로어이스트사이드(Lower East Side) 였습니다.

◼ 가장 가난한 동네, 가장 밀도 높은 꿈
1880년부터 1924년까지, 동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유대인은 약 200만~250만 명에 이릅니다. 러시아 제국의 포그롬(유대인 학살), 폴란드의 극심한 빈곤, 루마니아의 박해를 피해 대서양을 건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대부분이 처음 발을 디딘 곳이 맨해튼 남쪽 끝, 가로 몇 블록의 작은 동네였습니다.

1900년, 로어이스트사이드의 인구 밀도는 에이커당 700명 이상에 달했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믿기 어려운 숫자입니다. 한 개의 방에 가족 여섯 명이 살았고, 창문 없는 방이 정상이었으며, 화장실은 건물 전체가 공동으로 썼습니다. 헤스터 스트리트(Hester Street)와 오차드 스트리트(Orchard Street)는 낮이고 밤이고 사람으로 넘쳐났습니다. 이디시어가 거리를 가득 채웠고, 코셔 푸줏간 옆에 탈무드 학교가 있었으며, 그 옆에는 노동운동 신문사가 있었습니다.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멈추지 않았습니다.
◼ 손수레 하나에서 시작한 경제
로어이스트사이드의 경제는 손수레(Pushcart) 에서 시작됐습니다. 1905년 당시, 이 동네 거리에는 약 3만 개의 손수레 노점이 있었습니다. 채소, 청어 절임, 천 조각, 중고 의류, 냄비, 성냥, 사탕, 책…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오차드 스트리트는 사실상 거대한 야외 시장 그 자체였습니다.

손수레는 단순한 장사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본 없이 시장에 진입하는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영어도 모르고, 신용도 없고, 연줄도 없는 이민자에게 손수레는 허들이 없는 시장이었습니다. 수레를 빌리는 비용은 하루 몇 센트, 상품은 도매상에서 외상으로 가져왔습니다. 이익이 나면 다음 날 갚고, 조금씩 쌓으면 자기 수레를 샀습니다. 자기 수레가 생기면 이웃에게 수레를 빌려주며 임대 수익을 냈습니다. 탈무드가 수천 년 전 가르친 "작은 자본으로 큰 네트워크를" 의 원리가 뉴욕 거리에서 그대로 작동했습니다.
◼ 재봉틀 소리가 밤새 멈추지 않던 곳
손수레와 함께 로어이스트사이드를 먹여 살린 것은 의류 산업(Garment Industry) 이었습니다. 1910년, 뉴욕은 미국 전체 여성 의류의 70%, 남성 의류의 40% 를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그 공장 노동자의 대부분이 유대인 이민자였습니다.
맨해튼의 의류 지구(Garment District) 는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지하 창고와 좁은 건물 상층부를 빼곡히 채운 재봉 공장들, 새벽부터 밤까지 돌아가는 재봉틀 소리, 천 조각이 가득 쌓인 계단. 이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하루 12~14시간씩 일했고, 주급은 불과 5~6달러였습니다.

그리고 1911년 3월 25일, 비극이 찾아왔습니다. 맨해튼 그리니치 빌리지의 트라이앵글 셔츠웨이스트 공장에서 불이 났습니다. 불길이 번지던 순간 공장 문은 잠겨 있었습니다. 노동자들이 도망칠 수 없도록 고용주가 잠근 것이었습니다. 146명이 죽었습니다. 대부분이 10대~20대 초반의 유대인·이탈리아계 여성들이었습니다.
이 화재가 만들어낸 것이 현대 미국의 노동법입니다. 뉴욕주는 이후 2년 만에 56개의 노동 관련 법을 통과시켰습니다. 화재 안전 기준, 최대 노동 시간, 아동 노동 금지. 이민자의 죽음이 미국 전체의 노동권을 바꿔놓은 것입니다.
◼ 손수레에서 백화점으로 — 거대한 도약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로어이스트사이드에서 손수레를 밀던 세대의 자녀들, 혹은 조금 더 앞서 이민 온 유대인들이 뉴욕의 상업 지도를 다시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메이시스(Macy's). 1858년 설립된 이 백화점을 1896년 단독 인수한 것은 독일계 유대인 이민자 출신의 이지도어 스트라우스(Isidor Straus)와 네이선 스트라우스(Nathan Straus) 형제였습니다. 이들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직원 상호부조 기금을 만든 경영자들이었습니다. 이지도어는 1912년 타이타닉 침몰과 함께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내 이다(Ida)가 구명보트를 거부하고 남편 곁에 남은 것으로도 유명한 그 이야기입니다.
블루밍데일스(Bloomingdale's). 1861년 유대인 이민자 요셉 블루밍데일과 라이먼 블루밍데일 형제가 설립했습니다. 처음엔 로어이스트사이드 인근에서 유럽산 후프스커트를 팔던 작은 가게였습니다.
삭스 피프스 애비뉴(Saks Fifth Avenue), 니만 마커스(Neiman Marcus), 버그도프 굿맨(Bergdorf Goodman). 이 모두가 유대인 창업자들의 손에서 탄생했습니다. 시어스(Sears)의 혁신을 이끈 **줄리어스 로젠왈드(Julius Rosenwald)**는 카탈로그 쇼핑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아마존보다 100년 앞서 미국 전역의 시골 마을로 상품을 배달했습니다.
브랜드 유대인 창업자/인수자 연도
| 메이시스 | 이지도어·네이선 스트라우스 인수 | 1896 |
| 블루밍데일스 | 요셉·라이먼 블루밍데일 창업 | 1861 |
| 삭스 피프스 애비뉴 | 앤드류 삭스 창업 | 1867 |
| 니만 마커스 | 카르바크·니만·마커스 창업 | 1907 |
| 버그도프 굿맨 | 에드윈 굿맨 창업 | 1901 |
| 시어스(카탈로그 혁신) | 줄리어스 로젠왈드 | 1895 |
◼ 이민자의 가방이 만든 패션 제국
백화점만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입는 옷에도 그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리바이 스트라우스(Levi Strauss). 1829년 독일 바이에른주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유대인 청년이었습니다. 1853년 샌프란시스코 골드러시의 물결을 타고 미국에 건너와 천 도매업을 시작했습니다. 광부들이 작업복이 너무 쉽게 찢어진다는 불만을 듣고, 튼튼한 데님에 구리 리벳을 박아 만든 바지를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청바지(Blue Jeans) 의 시작이었습니다. 오늘날 리바이스는 전 세계 110개국에서 판매되는 브랜드가 됐습니다.
랄프 로렌(Ralph Lauren). 본명은 랄프 리프쉬츠(Ralph Lifshitz). 1939년 뉴욕 브롱크스에서 벨라루스계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로어이스트사이드와 멀지 않은 가난한 동네 출신이었습니다. 1967년, 28세의 그는 넥타이 한 종류로 '폴로(Polo)'라는 브랜드를 시작했습니다. 그가 팔려 한 것은 단순한 옷이 아니었습니다. 미국 상류층의 생활 방식이라는 이미지였습니다. 이민자의 아들이, 이민자들이 동경하던 그 세계를 상품으로 만들어 팔았습니다.
캘빈 클라인(Calvin Klein), 도나 카란(Donna Karan), 마이클 코어스(Michael Kors). 모두 유대계 디자이너들이 뉴욕에서 만들어낸 이름들입니다. 미국 패션 산업의 중심에는 언제나 로어이스트사이드에서 출발한 이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 왜 이민자들은 상업에 강했는가
이쯤에서 질문이 생깁니다. 왜 하필 유대인 이민자들이었을까요. 물론 다른 이민자들도 뉴욕에 왔습니다. 이탈리아인, 아일랜드인, 중국인, 폴란드인. 그런데 유독 유대인 이민자들이 백화점, 패션, 금융으로 올라간 이야기가 두드러집니다.
몇 가지 구조적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읽고 쓰는 능력입니다. 유대교 전통에서 남성은 반드시 토라(성경)를 읽을 수 있어야 했습니다. 덕분에 동유럽 유대인 남성의 문해율은 같은 시대 다른 집단보다 압도적으로 높았습니다. 상업 계약서를 읽고, 장부를 기록하고, 거래를 추적하는 능력이 기본으로 장착되어 있었습니다.
둘째, 네트워크의 힘입니다. 8편 암스테르담에서, 9편 런던에서, 이전 워털루 편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 그 원리입니다. 같은 언어(이디시어), 같은 종교, 같은 음식 규율(코셔)로 묶인 공동체는 서로를 신용했습니다. 낯선 땅에서 외상을 주고받을 수 있는 유일한 상대는 같은 공동체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신용 네트워크가 손수레의 외상 거래를 가능하게 했고, 나중에는 기업 투자와 경영권 이전까지 이어졌습니다.
셋째, 배제가 만든 특화입니다. 유럽에서 수백 년간 땅을 소유할 수 없었고, 길드(동업 조합)에 가입할 수 없었던 역사가, 역설적으로 유대인을 상업·금융·무역에 특화시켰습니다. 다른 길이 막혀 있었기에, 열린 길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달렸습니다.
◼ 오천 년 여정의 종착지가 아닌 분기점
로어이스트사이드는 그 모든 여정의 종착지가 아니었습니다. 탈무드 경제학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알함브라의 추방을 거쳐, 암스테르담의 자본으로, 런던의 정보로, 앤트워프의 다이아몬드로, 베네치아의 게토로, 오스만의 무역로로, 프랑크푸르트의 골목으로, 워털루의 국채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번 편, 뉴욕의 손수레까지 흘러온 것입니다.
손수레는 백화점이 됐고, 재봉틀은 패션 제국이 됐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미국이라는 나라의 소비 문화 자체였습니다. 백화점이 보편화되기 전, 미국에서 좋은 물건을 구경하는 것은 부유층의 특권이었습니다. 이민자 출신 유대인 상인들이 만든 백화점은 중산층 가정이 한 지붕 아래서 다양한 상품을 경험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것이 20세기 미국 소비 사회의 출발점이었습니다.
헤스터 스트리트의 손수레 상인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미는 그 낡은 수레 위에 훗날 미국 소비 문명의 씨앗이 담겨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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