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편 9] 제주와 말의 경제학 — 제국의 목장이 된 섬
[고려편 9] 제주와 말의 경제학 — 제국의 목장이 된 섬

오늘날 제주를 떠올리면 귤, 바다, 돌담, 바람, 그리고 말이 함께 떠오릅니다.
그중에서도 제주마는 제주를 상징하는 존재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 말의 역사는 낭만적인 초원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고려 말 제주의 말은 관광 자원도, 지역 특산품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제국이 탐낸 전략 자원이었습니다.

말은 전근대 사회에서 오늘날의 자동차와 트럭, 통신망을 합친 존재였습니다. 군대를 이동시키는 수단이었고, 명령을 전달하는 통신망이었고, 물자를 운반하는 물류 장비였으며, 기병 전력의 핵심이자 외교와 공물 체제의 고급 자원이었습니다.
말을 장악한다는 것은 곧 이동력과 군사력을 장악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고려와 원, 일본 원정 사이에서 제주는 바로 이 말 때문에 제국의 지도 위에 선명하게 찍혔습니다.
삼별초 이후 — 저항의 섬에서 제국의 거점으로

1270년 고려가 개경으로 환도하자, 무신정권의 군사 기반이었던 삼별초는 이에 반발했습니다. 삼별초는 진도에서 저항하다가 다시 제주로 이동해 항전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1273년, 고려와 몽골 연합군은 제주 삼별초를 진압했습니다.
이때부터 제주의 운명은 크게 바뀝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탐라만호부」는 원이 삼별초를 토벌한 뒤 제주에 탐라국초토사를 설치하고, 제주를 원의 직할령으로 편입했다고 설명합니다. 그 목적은 단지 삼별초 잔여 세력을 정리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원은 제주를 삼별초 잔여 세력 통제, 탐라 주민 회유와 지배, 일본 원정 준비, 남송 정벌과 해상 전략, 그리고 말과 물자를 공급하는 군수 거점으로 보았습니다. 제주는 멀리 떨어진 섬이 아니라, 동아시아 해상 네트워크의 한복판이었습니다. 한반도 남쪽, 일본과 중국 남부를 연결하는 위치. 넓은 초지와 방목 가능한 중산간 지대. 배를 만들 수 있는 목재와 해상 거점으로서의 가치.

몽골 제국의 눈에는 제주의 바람과 풀밭이 다르게 보였을 것입니다. 말 키우기 좋고, 일본을 치러 가기도 좋은 땅으로 말입니다.
제국의 시선은 낭만이 아니라 물류와 군사로 움직입니다.
탐라총관부와 탐라만호부 — 제주가 제국 행정망에 들어가다
삼별초가 진압된 뒤 원은 제주에 여러 지배 기구를 설치했습니다. 1270년대 이후 원은 탐라를 직할령으로 삼아 여러 관청과 목마장을 설치했습니다. 1276년에는 몽골식 목마장이 들어섰고, 이후 일본 원정 준비와 실패를 거치며 지배 기구의 이름과 성격이 여러 차례 바뀌었습니다.

1294년 무렵 탐라가 한때 고려에 반환되었다가, 원이 목마장 관리를 구실로 다시 지배 기구를 설치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고려의 요청으로 탐라만호부가 설치되었고, 공민왕대 반원정책 속에서 폐지되었습니다. 탐라만호부는 왜구 방지와 진수 기관의 성격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원과 고려 사이에서 제주 목마장과 말 공급을 관리하는 중요한 장치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하나입니다. 제주는 고려의 지방이면서도, 원의 군사·목축 이해관계가 깊이 박힌 공간이었습니다. 행정권은 고려와 원 사이를 오갔고, 목마장과 말의 소유·공급 문제는 계속 갈등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제주는 이 시기 완전한 중심도, 단순한 변방도 아니었습니다.
제국과 왕조가 겹쳐진 변경 경제였습니다.
말은 왜 전략 자원이었나
몽골 제국은 말 위에서 성장한 제국이었습니다. 말이 충분해야 군대가 빠르게 움직이고, 명령이 빨리 전달되고, 정복지가 연결되었습니다. 말이 부족하면 제국의 속도도 느려졌습니다.

제주 목마장은 바로 이 제국적 수요와 연결됩니다. 말은 단순한 가축이 아니었습니다. 군사 자원으로는 기병과 방어 체계의 핵심이었고, 교통수단으로는 관리와 사신, 군대의 이동을 담당했으며, 물류 자원으로는 물자 운반과 역참 운영을 뒷받침했습니다.
외교 자원으로는 공물과 진상품, 교역품이 되었고, 재정 자원으로는 국가가 관리하는 고급 생산물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비유하면 말은 군용 차량과 트럭, 연료와 통신망을 합친 전략 물자였습니다. 그래서 원은 제주에 목마장을 설치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목호의 난」에 따르면, 1276년 원은 제주에 목마장을 두고 몽골인 목자, 즉 목호를 보내 말을 기르게 했습니다.
여기서 제주의 경제 구조가 바뀝니다. 기존의 농경·어로 중심 생활에 대규모 목축 체제가 결합됩니다. 중산간 지대가 방목지로 활용되고, 목축 전문 인력이 들어오고, 말 관리와 공마 공급이 지역 경제의 중요한 축이 됩니다.
제주는 점점 섬이 아니라 제국의 목장이 되어갔습니다.
목마장의 경제학 — 풀밭도 국가 자산이 된다
목마장이 설치된다는 것은 단순히 말을 풀어놓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땅의 사용 방식이 바뀐다는 뜻입니다.

목마장 경제에는 방목지, 물, 목책과 경계, 말 관리 인력, 번식 관리, 낙인과 소유 표시, 질병 관리, 운송로, 공마 선발 체계까지 여러 요소가 필요했습니다. 목마장은 거대한 생산 시스템이었습니다.
제주에는 넓은 초지와 중산간 지대가 있었습니다. 이 조건은 목축에 유리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지역민에게 부담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목마장이 확대되면 농민의 경작 공간이 줄 수 있고, 목자와 주민에게 관리 부담이 생겼습니다. 말을 잃거나 죽이면 책임 문제가 따랐고, 중앙과 제국의 수요에 따라 지역 노동력이 동원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6편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6편에서 우리는 원 간섭기의 공물경제를 보았습니다. 금과 은, 포와 인삼, 매와 공녀처럼, 말 역시 제국이 요구한 자원이었습니다. 다만 말은 더 복잡했습니다.
말은 한 번 바치고 끝나는 물건이 아니라, 계속 길러야 하고 관리해야 하고 번식시켜야 하는 살아 있는 군수품이었습니다. 말 한 필 뒤에는 풀밭, 목자, 물, 길, 세금, 노동이 붙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주와 말의 경제학입니다.
목호의 난 — 말의 소유권을 둘러싼 갈등
제주의 말 문제는 원이 약해진 뒤에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몽골 제국이 무너지고 명이 등장하자, 제주 말의 향방은 다시 정치 문제가 되었습니다. 고려는 1295년 제주목을 설치해 행정권을 장악했지만, 제주 목마장과 말의 소유권은 여전히 몽골 측에 있었습니다.
1368년 명이 건국된 뒤, 명은 과거 몽골이 깊이 관여하던 제주 목마장과 마필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공민왕은 제주도 자체는 고려가 차지하되, 몽골 측에 보내던 말을 명에 보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에 목호들은 반발했습니다. "세조 황제, 즉 쿠빌라이가 풀어먹인 말을 어찌 명나라에 바칠 수 있겠는가"라는 논리였습니다. 말은 단순한 가축이 아니라 정치적 충성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원 제국의 말이냐, 고려의 말이냐, 명의 말이냐. 이 문제는 동아시아 질서가 원에서 명으로 바뀌는 순간의 갈등이었습니다.

결국 고려는 최영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대규모 군대를 제주에 보냈습니다. 사료에 따라 수치에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2만 5천여 명 규모의 병력과 300여 척의 전함이 동원된 것으로 전합니다. 전투 후 고려군은 말 1,700여 필을 뽑아 개경으로 돌아왔습니다.
목호의 난은 단순한 반란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제주의 말과 목마장을 둘러싼 제국 교체기의 자원 전쟁이었습니다. 원에서 명으로, 몽골에서 고려로, 제국의 소유에서 왕조의 소유로.
말의 주인이 바뀌는 과정에서 제주가 다시 피를 흘린 것입니다.
조선으로 이어진 흐름 — 제주 목마장 체제의 장기화
고려 말 원이 만든 제주 목마장 체제는 조선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조선은 이를 국가 마정 체제 안으로 흡수했습니다. 우리역사넷 「목장의 실태」에 따르면, 제주도 목장은 고려 충렬왕 2년, 즉 1276년에 몽고식 목장이 설치된 이래 발달했습니다.

조선시대 제주도는 섬 전체가 목장처럼 운영되었고, 15개소에서 이후 64개 목장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제주의 말 규모도 상당했습니다. 세종 28년인 1446년에는 제주 목장의 말이 9,780필이었고, 숙종 4년인 1678년에는 12,411필로 늘었습니다. 성종 대에는 2만에서 2만 6,400여 필 규모로 추정됩니다. 숙종 대에는 제주 목자가 1,386명으로 전국 목자 수의 약 4분의 1을 차지했고, 제주 말은 전국 말의 절반이 넘는 규모였다고 설명됩니다.
원 지배기에 시작된 제주 목마장 체제가 조선의 국가 시스템 속에서도 계속되었다는 뜻입니다. 제주는 원의 군마 공급지에서 조선의 군마 공급지로 전환되었습니다. 주인은 바뀌었지만, 구조는 이어졌습니다.
제주 사람들에게 말은 생업이자 부담이었습니다. 자랑스러운 지역 자원이면서 동시에 국가가 요구하는 공적 자원이었습니다.
제주 목마장 체제는 전략 자원이 지역 경제를 어떻게 장기적으로 규정하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문화 하이브리드 — 말만 온 것이 아니었다
이 시기 제주의 변화는 말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원 지배와 몽골계 인구의 유입, 목호와 군사 주둔, 해상 교류는 제주 생활문화에도 흔적을 남겼습니다. 다만 여기서는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합니다. 제주 문화의 모든 요소를 "몽골에서 왔다"고 단정하면 위험합니다. 제주 고유의 자연환경, 탐라의 기존 문화, 고려·송·원·일본과의 해상 교류가 함께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원 지배기는 제주 문화가 외부 요소와 강하게 접촉한 시기였고, 그 결과 목축·술·음식·생활양식에서 여러 혼합적 흔적이 나타났습니다.
증류 기술의 이동

소주는 대표적인 문화 전파 사례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소주」는 소주가 고려 충렬왕 때 몽고군을 통해 도입되었고, 몽고군 주둔지였던 안동·개성·제주도에서 제조법이 발달했다고 설명합니다. 제주의 고소리술은 이 흐름과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소리술」은 고소리술을 좁쌀로 빚은 제주 전통 증류주로 설명합니다. 쌀이 적은 제주에서 조를 이용해 술을 빚고, 이를 고소리, 즉 소줏고리로 증류했습니다. 술은 곡물 이용 방식과 저장 기술, 제례와 혼례 문화, 지역 특산품, 증류 기술, 교역과 접대 문화를 모두 담고 있는 물건입니다. 제주의 고소리술은 외래 증류 기술이 제주 농업 환경, 특히 밭곡식 중심 생활과 결합한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증류주 이야기는 그 자체로 풍부한 소재라, 음식과 술의 언어로는 쫀쿠 쪽에서 더 깊이 다룰 예정입니다. 여기서는 제주 경제사의 한 조각으로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메밀과 빙떡 — 척박한 땅이 만든 음식 문화
제주 하면 메밀도 빼놓기 어렵습니다. 제주는 오늘날에도 메밀 생산지로 유명하고, 빙떡은 제주 향토음식의 대표 주자입니다. 메밀이 원 지배기나 몽골과 관련되어 전래되었다는 이야기는 제주 민속과 음식 이야기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다만 문헌적으로 "원나라가 메밀을 이때 제주에 보급했다"고 단정하기에는 조심스럽습니다. 설화와 민간 전승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경제사적으로는 충분히 이야기할 만합니다. 메밀은 척박한 땅에서도 비교적 잘 자라고, 생육 기간이 짧으며, 논농사가 어려운 지역에서 유용하고, 구황작물 역할도 가능했습니다.
제주의 화산섬 환경, 밭농사 중심 구조, 쌀 부족이라는 조건 속에서 메밀은 매우 실용적인 작물이었습니다. 빙떡은 메밀가루 반죽에 무채를 넣어 말아 먹는 음식입니다. 쌀이 귀한 지역에서 메밀과 무를 활용해 적은 재료로 포만감과 영양을 얻는 생활경제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메밀의 정확한 전래 경로는 단정하기 어렵지만, 원 지배기 이후 제주가 외부 작물과 식문화를 받아들이는 통로였다는 점, 그리고 메밀이 제주의 척박한 농업 환경에 잘 맞는 작물이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목축 기술과 중산간 마을
원 지배기의 가장 뚜렷한 변화는 목축입니다. 몽골계 목자, 즉 목호가 들어오면서 제주에는 말 사육 기술과 방목 방식이 강화되었습니다. 말의 번식, 낙인, 방목지 관리, 목장 운영 방식이 제주의 생활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 변화는 공간 구조도 바꾸었습니다.

기존 제주의 생활권은 해안 마을 중심이었습니다. 하지만 목축이 확대되면서 중산간 지역의 활용도가 커졌습니다. 목장, 방목지, 목자, 산촌 생활이 서로 연결되었습니다. 말은 단순히 경제 자원만이 아니라 제주 사람들이 사는 공간을 바꾼 힘이었습니다.
언어·성씨·생활양식의 흔적
원 지배기에는 몽골계 군인, 목자, 관리, 유배인 등이 제주에 들어왔습니다. 그 일부는 제주에 정착했고, 제주 사람들과 혼인하거나 지역사회에 흡수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언어, 성씨, 지명, 생활양식에 몽골계 흔적이 남았다는 연구와 주장들이 있습니다. 다만 이 부분은 항목별로 확정성이 다르기 때문에, 가능성과 흔적 정도로 다루는 편이 안전합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제주는 원 지배기 동안 외부 인구가 유입되고, 군사·목축·행정 기구가 들어오면서 문화 접촉이 강해졌습니다. 그 결과 제주 문화는 고립된 섬 문화가 아니라, 동아시아적 요소가 섞인 복합 문화로 발전했습니다.
제주는 닫힌 섬이 아니라 열린 접점이었습니다.
경제적 해석 — 수탈당했지만, 동시에 변형되었다
이번 편에서는 균형이 중요합니다. 제주 목마장 체제를 낭만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원 지배와 목마장은 지역민에게 큰 부담이었습니다.
말은 제국의 자원이었고, 제주는 그 자원을 생산하는 공간으로 동원되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제주 사회는 그 압력 속에서 새로운 기술과 문화를 흡수했습니다. 말은 군사·교통·통신·외교의 핵심 전략 자원이었습니다. 제주 목마장은 일본 원정과 제국 군사망에 연결된 군수 공급망이었습니다. 제주는 고려와 원, 이후 명과 조선 사이의 경계에 놓인 변경 경제였습니다. 목장 설치와 공마 요구, 노동 동원과 토지 이용 변화는 지역에 대한 수탈이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몽골식 목축과 방목, 말 관리 기술이 유입되는 기술 이전의 통로였고, 소주와 고소리술, 메밀 음식, 목축 생활 같은 문화 혼합이 일어난 공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원의 목마장 체제는 조선의 제주 목마장으로 그대로 이어지는 장기 지속의 사례이기도 했습니다. 제주는 제국의 압력을 받은 지역이면서 동시에 외래 요소를 제주식으로 바꿔낸 지역이었습니다.
오십보의 한 걸음
제주의 말은 단순한 가축이 아니었습니다. 고려 말 제주의 말은 제국이 탐낸 전략 자원이었습니다. 원은 삼별초를 진압한 뒤 탐라를 직접 지배하고, 목마장을 설치했습니다. 제주는 일본 원정을 준비하는 전초기지이자 군마 공급지가 되었습니다. 말은 제국의 군수품이었고, 제주는 그 군수 공급망의 한복판에 놓였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늘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습니다.
제국은 제주를 지배했지만, 제주는 외래 문화를 그대로 복사하지 않았습니다. 목축 기술은 제주마와 중산간 목장 문화로 남았고, 증류 기술은 고소리술 같은 지역 술문화와 만났습니다. 메밀과 빙떡 같은 음식문화도 제주 환경 속에서 독자적인 생활경제로 자리 잡았습니다. 제주는 수탈당한 변방이었지만, 동시에 섞고 바꾸고 살아남은 섬이었습니다.
말은 제국을 위해 달렸지만, 그 말이 남긴 길 위에서 제주의 문화도 새롭게 자랐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고려편의 마지막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벽란도에서 시작해 팔만대장경, 청자, 직지, 무신정권과 원 간섭기, 화약, 목화, 그리고 제주까지 — 이 모든 이야기가 결국 조선으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정리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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