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편 6] 무신정권과 몽골 복속기 — 공물경제 100년
안녕하세요. 오십보입니다.
앞선 4편과 5편에서는 고려의 기술을 이야기했습니다.
4편에서는 고려청자를 보았습니다. 비색이라는 색, 상감이라는 기술, 강진과 부안의 생산 클러스터. 기술이 수요와 만나면 어떻게 브랜드가 되는지를 살펴봤습니다.
5편에서는 직지와 금속활자를 보았습니다. 구텐베르크보다 앞선 기술이 있었지만, 왜 대량 인쇄와 정보 혁명으로 이어지지 못했는지를 생각했습니다. 기술은 있었지만, 시장과 문자 체계와 독자층이 아직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이번에는 방향을 바꿔보겠습니다. 이번에는 기술이 아니라 권력입니다. 정치가 흔들릴 때 경제는 어떻게 변할까요. 국가가 전쟁과 외세의 압박을 받을 때, 그 비용은 누가 냈을까요. 오늘의 주제는 무신정권과 몽골 복속기입니다.
1170년 무신정변 이후 고려는 오랜 시간 무신정권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몽골과의 전쟁, 강화도 천도, 개경 환도, 원 간섭기를 거치며 또 다른 형태의 부담을 짊어졌습니다. 이 시기의 경제를 한 단어로 요약하면 '전가'입니다. 권력자는 비용을 만들고, 국가는 그 비용을 걷고, 마지막 부담은 백성에게 내려갔습니다.
무신정권, 왕조 안의 또 다른 경제 기반
1170년, 고려에서는 무신정변이 일어났습니다. 문신 중심의 귀족정치에 밀려 있던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한 사건입니다. 이후 고려의 정치 구조는 겉으로는 왕이 있는 왕조였지만, 실제 권력은 무신 집권자에게 있었습니다.
특히 최충헌 이후 최씨 정권은 오랜 세월 세습에 가까운 권력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경제적으로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무신정권은 왕조라는 틀 안에서, 사병 조직과 농장이라는 별도의 사적 권력·경제 기반을 함께 키운 체제였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도방과 삼별초입니다. 도방은 무신 집권자의 사병 조직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경대승이 자신의 신변을 지키기 위해 만든 사병 집단이었고, 이후 최충헌과 최우 대에 이르러 정권을 지탱하는 중요한 무력 기반이 되었습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도방을 무신정권의 사적 기구로 설명하며, 최씨 정권 시기에는 내·외 도방으로, 나아가 훨씬 큰 규모의 체제로 확대되었다고 정리합니다.
삼별초는 조금 더 복합적입니다. 처음에는 야간 순찰과 도둑 단속에서 출발했지만, 이후 좌별초·우별초·신의군으로 정비되면서 경찰·군사 기능을 동시에 담당했습니다. 그래서 삼별초는 단순한 사병이라기보다 반관반사, 즉 공적 기능과 사적 권력의 성격이 섞인 특수 부대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경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사병은 누가 먹였을까요. 무기를 누가 마련했을까요. 말을 누가 길렀고, 군량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권력은 칼로 잡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칼을 계속 들고 있으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무신정권의 경제 기반은 결국 토지였습니다.
사병 경제의 뒤에는 농장이 있었다
고려 후기 경제를 이해할 때 빠질 수 없는 단어가 있습니다.
농장(農莊)입니다.
여기서 농장은 오늘날의 평화로운 농장 이미지가 아닙니다. 권세가들이 토지를 넓게 차지하고, 그 안에서 조세와 노동력을 사실상 사적으로 흡수하던 대토지 지배 구조에 가깝습니다. 무신정권기에는 집권 무신과 권세가들이 토지를 겸병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은 고려 후기 사회모순을 설명하면서, 12세기 이래 진행된 토지겸병이 무신집권기를 거치며 더 가속화되었고, 원 간섭기 이후에는 더욱 심각해졌다고 설명합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권문세족 항목도 비슷하게 말합니다.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은 대토지를 집적해 형성한 농장이었고, 무신집권기에 집권 무신들에 의해 토지 집적과 농장 경영이 유행했다고 설명합니다.
이 구조의 핵심은 간단합니다. 권력자가 토지를 차지하면, 국가는 세금을 잃습니다. 국가는 세금을 잃으면, 부족해진 세원을 메우기 위해 나머지 수취 대상에게 부담을 집중시키는 경향이 강해집니다. 권력층은 농장을 통해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남의 토지를 빼앗거나, 수조권을 이용하거나, 고리대를 통해 농민의 토지를 흡수했습니다. 심지어 일반 양인을 억지로 노비로 만드는 압량위천 같은 현상도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부동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고려 국가 재정의 기반이 흔들리는 문제였습니다. 국가 입장에서는 백성이 자기 땅에서 농사짓고 세금을 내야 재정이 유지됩니다. 그런데 권세가의 농장이 커지면, 그 안의 사람과 토지는 국가의 직접 수취망에서 빠져나갑니다. 그러면 국가는 어떻게 할까요.
지출은 줄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쟁과 외교 비용 때문에 더 늘어납니다. 그래서 국가는 남아 있는 백성에게 더 거둡니다. 이것이 고려 후기 경제의 악순환입니다.
권력층의 농장 확대가 국가 재정을 약화시키고, 그 결과 조세 부담이 늘고, 농민이 몰락하고, 유민이 늘고, 다시 생산 기반이 약해지는 흐름입니다.
몽골과의 전쟁은 전시 재정을 만들었다
무신정권의 경제 구조가 이미 불안정해진 상태에서 고려는 몽골의 침입을 맞았습니다. 몽골의 침입은 1231년부터 본격화되었습니다.
고려는 강화도로 천도하며 장기 항전에 들어갔고, 이 전쟁은 고려 사회 전체를 소모시켰습니다.
전쟁은 언제나 비용을 요구합니다. 성곽을 고쳐야 합니다. 군량을 모아야 합니다. 병사를 동원해야 합니다. 배를 만들고, 무기를 만들고, 피난한 조정과 관료 조직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 비용은 장부 위에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는 곡식, 노동, 나무, 쇠, 말, 배, 사람의 시간으로 나타납니다.
앞서 3편에서 팔만대장경을 이야기할 때도 보았지요. 몽골 침입이라는 위기 속에서 고려는 대장경판이라는 거대한 국가 프로젝트를 수행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산물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국가가 자원과 기술과 노동을 동원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재정 프로젝트였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길어지면 문제는 더 커집니다. 전시 재정은 평시 재정보다 훨씬 거칠게 작동합니다. 정상적인 세금만으로는 감당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임시세가 붙습니다. 부역이 늘어납니다. 지역별 할당이 생깁니다. 곡식과 사람을 급하게 모읍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은 고려 후기 사회모순을 설명하며, 일본 정벌을 위한 군사비와 국왕·사신의 잦은 원 왕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과렴 같은 임시세가 부과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권력층이 자신의 토지에서 조세를 내지 않으면서 그 부담이 향리와 백성에게 돌아갔다고 정리합니다. 전쟁의 부담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뉘지 않았습니다. 힘 있는 사람은 빠져나가고, 힘없는 사람에게 더 내려갔습니다.
몽골 복속 이후, 고려는 공물경제로 들어갔다
고려는 오랜 전쟁 끝에 원과 강화했고, 이후 원의 간섭을 받게 됩니다.
이 시기를 보통 원 간섭기라고 부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원간섭기를 대체로 1259년부터 1356년까지, 약 한 세기 가까이로 설명합니다.
다만 무신정권 붕괴와 개경 환도 시점인 1270년, 혹은 삼별초 항쟁이 끝난 1273년을 중요한 전환점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 말하는 '공물경제 100년'은 딱 100년을 기계적으로 세자는 뜻이 아닙니다. 무신정권 후반, 대몽항쟁, 개경 환도, 원 간섭기를 거치며 고려 경제가 약 한 세기 동안 외부 압력과 내부 수탈 구조에 묶였다는 의미입니다.
원 간섭기의 부담은 여러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첫째, 공물입니다. 금, 은, 포, 인삼, 잣, 매, 말 같은 물품이 요구되었습니다. 품목은 시기와 상황에 따라 달랐고, 모든 해에 동일한 수량이 고정적으로 부과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둘째, 인적 공물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공녀와 환관입니다. 원은 고려에 여성과 환관을 요구했고, 이것은 단순한 외교 의례가 아니라 가족과 지역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긴 인적 수탈이었습니다.
셋째, 군사·병참 부담입니다. 특히 일본 원정 준비 과정에서 고려는 군사, 선박, 군량, 선원, 장인을 대규모로 동원해야 했습니다.
넷째, 왕실·사신 왕래 비용입니다. 고려 국왕이 원에 자주 가고, 사신이 오가면서 그 비용 역시 고려 재정의 부담이 되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원간섭기 항목은 이 시기 고려가 원의 여러 전쟁에 군대와 각종 물자를 제공하고, 공물과 공녀·환관 등을 원에 보내면서 일반 백성의 피해가 컸다고 정리합니다.
공물은 외교의 언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재정의 언어입니다. 왕이 원에 무엇을 바쳤다는 기록 뒤에는, 그 물건을 생산한 사람, 운반한 사람, 세금으로 부담한 사람이 있습니다. 공물은 궁궐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마을에서 출발합니다.
매년 무엇을 얼마나 바쳤나 — 숫자는 조심스럽게 보아야 한다
이 대목은 조심해서 써야 합니다.
"고려가 매년 원에 얼마를 바쳤다"라고 한 줄로 정리하면 시원해 보이지만, 실제 역사 기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공물의 종류와 수량은 시기, 사건, 원의 요구, 고려의 대응에 따라 달랐습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고정된 연간 세율처럼 말하기보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대표 사례를 통해 부담의 규모를 보겠습니다.
공녀와 인적 수탈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의 「원의 공녀 요구」 사료 해설에 따르면, 1274년 원은 남송 군인들을 장가보낸다는 명목으로 고려에 부녀 140명을 요구했고, 고려는 결혼도감을 설치해 이를 처리했습니다. 1275년에도 원 세조가 미녀 헌납을 요구하여 동녀 10명을 보냈습니다. 공민왕 초까지 약 80여 년 동안 공녀 문제가 50여 건 일어났다고 설명합니다. 이곡의 글에는 한 번 선발할 때 많게는 40~50명에 이르렀고, 한 해에 한두 번 있거나 해를 걸러 일어나기도 했다는 내용도 보입니다.
이 숫자는 단순한 통계가 아닙니다.
그 뒤에는 딸을 숨기는 집, 이웃까지 조사받는 마을, 송별하며 통곡하는 가족이 있었습니다. 경제학적으로 보면 공녀는 매우 잔혹한 형태의 인적 자원 유출입니다. 한 개인의 생애가 외교 비용으로 전환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본 원정의 군사·선박·군량 부담

몽골의 일본 원정은 고려 경제에 큰 부담을 주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은 1274년 1차 원정 때 고려에서 연인원 3만여 명을 동원해 총 900척의 전함을 건조했다고 설명합니다. 원정군은 몽골·한군 2만 5천 명, 고려군 8천 명, 뱃사공과 안내자 등 6천 7백 명을 포함해 총 4만 명에 가까웠습니다.
1281년 2차 원정 때도 고려는 전함 900척, 정군 1만 명, 뱃사공 등 1만 5천 명, 군량 11만 석을 준비했습니다. 1285년에는 3차 원정 준비 명령으로 고려에 군사 1만 명, 전함 650척, 군량 10만 석을 준비하라는 요구가 있었다고 우리역사넷은 설명합니다. 다만 이 3차 원정은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이 숫자들은 고려가 단순히 조공품 몇 상자를 보낸 수준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고려는 원의 대외전쟁에서 병참기지이자 선박 공급처이자 인력 동원지였습니다.
쌀 부담의 계층별 할당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일본원정 항목은 1283년 3차 정벌 준비 과정에서 군량을 충당하기 위해 계층별로 쌀을 부담시킨 사례를 소개합니다. 제왕·재추·승지에게는 쌀 20석, 3품 관료에게는 15석, 4·5품에게는 10석, 6품과 시위호군에게는 8석, 7·8품에게는 6석, 9품에게는 4석을 부담시켰습니다. 백정, 초노, 소유, 정리, 제사하전, 독녀, 관사노비에게도 10두를 내게 했고, 상인도 대호·중호·소호로 나누어 부담했습니다.
이 기록이 보여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전쟁 비용은 지배층만의 부담이 아니었습니다. 노비와 독신 여성에게까지 내려갔습니다.
이것이 공물경제의 실체입니다. 외교와 전쟁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비용이 사회의 가장 낮은 곳까지 흘러내린 것입니다.
매와 말도 경제였다
원 간섭기의 공물 가운데 흥미로운 품목이 있습니다. 매와 말입니다.
매는 단순한 새가 아니었습니다. 사냥 문화와 귀족 취향, 왕실 권위, 원과 고려의 관계가 얽힌 고급 공물 자원이었습니다.
고려에는 매의 사육과 매사냥을 담당하는 응방이 설치되었습니다. 우리역사넷의 매사냥 자료에 따르면 충렬왕 대에는 응방 관련 관리가 각 도에 파견되었고, 응방도감도 설치되었습니다. 원에서도 응방 관리를 고려에 파견했습니다. 매를 기르는 일은 낭만적인 취미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민간에 폐해가 컸습니다. 매 먹이로 닭과 개가 약탈되었다는 기록도 전합니다. 귀족의 취미가 마을의 비용으로 바뀐 셈입니다.
말은 더 직접적인 군수 자원이었습니다. 특히 제주, 즉 탐라는 원 간섭기 경제를 이해하는 중요한 공간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탐라만호부 항목에 따르면, 원은 1273년 삼별초를 진압한 뒤 제주를 원의 직할령으로 편입하고, 일본 경략과 남송 정벌을 위한 전략기지로 삼고자 했습니다. 이후 목마장을 설치했고, 탐라는 원의 군사·목축 시스템과 깊이 연결되었습니다.
1294년 탐라가 고려에 반환된 뒤에도 원은 공마의 진상을 계속 요구했고, 1300년에는 목마장 관리를 구실로 다시 탐라총관부를 설치했습니다. 제주는 단순한 섬이 아니었습니다. 원 제국의 해양 전략, 말 공급, 일본 원정, 고려의 지방 지배가 겹친 공간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뒤에서 별도 편으로 다시 다루겠습니다.
결국 부담은 누구에게 전가되었나
이제 이 편의 핵심 질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무신정권과 몽골 복속기의 비용은 결국 누가 냈을까요.
첫째, 농민이 냈습니다.
권세가의 농장 확대와 국가의 수취 강화 속에서 농민은 이중 부담을 졌습니다. 권력층이 조세를 회피하면 국가는 남은 농민에게 더 거두었습니다. 토지를 잃은 농민은 전호가 되거나 유민이 되었습니다.
둘째, 장인과 노동자가 냈습니다.
전함 건조, 군수품 생산, 운송, 축성, 각종 공역은 노동력으로 치러졌습니다. 화폐로 계산되지 않았을 뿐, 그들의 시간과 몸이 비용이었습니다.
셋째, 여성이 냈습니다.
공녀는 원 간섭기 공물경제의 가장 비극적인 얼굴입니다. 한 사람의 삶이 국가 간 관계의 비용으로 바쳐졌습니다.
넷째, 지역사회가 냈습니다.
제주는 목마장과 군사기지로, 남해안과 합포 일대는 일본 원정의 병참기지로, 여러 지역은 공물과 군량 조달지로 기능했습니다.
중앙의 외교 결정이 지역의 노동과 생산을 바꾸었습니다.
다섯째, 국가 재정 자체가 냈습니다.
권력층의 토지 겸병은 국가의 세원을 약화시켰습니다. 국가는 돈이 없으니 더 거두고, 더 거두니 민생이 무너지고, 민생이 무너지니 다시 세원이 줄어드는 악순환에 빠졌습니다. 이 구조는 오늘날에도 낯설지 않습니다. 국가 재정이 약해지고, 특정 집단이 부담을 회피하고, 위기 비용이 사회적 약자에게 내려갈 때 경제는 오래 버티기 어렵습니다.
고려 후기의 문제는 단순히 "외세가 수탈했다"로 끝나지 않습니다.
외세의 압박도 컸지만, 내부의 권력 구조가 그 부담을 공정하게 나누지 못했습니다.
공물경제의 진짜 문제는 '물건을 바친 것'이 아니었다
공물경제의 문제는 고려가 원에 무언가를 바쳤다는 사실 자체만이 아닙니다. 전근대 국제질서에서 조공과 선물 교환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공물이 국가 재정의 정상적 범위를 넘어섰고, 그 부담이 불평등하게 전가되었다는 점입니다. 공물은 표면적으로는 왕과 황제 사이의 관계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 경제에서는 이런 경로를 밟습니다. 원의 요구가 고려 조정의 할당으로, 다시 지방관의 징수와 향리의 압박으로, 결국 농민·장인·여성·상인의 부담으로 내려가는 경로입니다. 즉, 국제정치의 압박이 지방 마을의 생계로 번역된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기를 공물경제로 읽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공물경제는 단순한 물자 이동이 아니라, 권력 관계가 비용을 만들어내고, 그 비용이 사회 내부에서 배분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고려 후기의 경우, 그 배분은 결코 공정하지 않았습니다.
오십보의 한 걸음
4편의 고려청자는 기술과 수요가 만났을 때 브랜드가 탄생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5편의 직지와 금속활자는 기술만으로는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6편의 무신정권과 몽골 복속기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기술도 중요하고 시장도 중요하지만, 그 위에 있는 정치 구조가 흔들리면 경제는 오래 버티기 어렵습니다. 고려에는 뛰어난 기술이 있었습니다. 청자를 만들었고, 대장경판을 새겼고, 금속활자로 책을 찍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술이 사회 전체의 생산성과 시장 확대로 이어지려면 안정적인 제도와 넓은 수요층, 그리고 예측 가능한 재정 구조가 필요했습니다.
무신정권과 원 간섭기의 고려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사병은 사적 권력을 키웠고, 농장은 국가 재정을 갉아먹었고, 공물은 민생을 압박했고, 전쟁은 노동과 곡식을 빨아들였습니다.
세금과 공물, 부역의 형식은 시기마다 달랐지만, 그 부담은 상대적으로 약한 집단에게 집중되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고려 말 개혁론과 신진사대부의 등장은 이런 배경 위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새 왕조 조선의 등장은 단순한 왕씨에서 이씨로의 교체가 아니라, 무너진 토지·재정 구조를 다시 짜려는 움직임과도 연결됩니다.
물론 그 개혁이 모든 백성에게 완전한 해방을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고려 후기의 공물경제와 농장경제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다음 편에서는 고려 말의 또 다른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왜구의 침입과 화약, 그리고 최무선입니다. 기술이 어떻게 국가 안보 산업이 되는지를 함께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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