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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경제학 9편] ASML과 EUV — 왜 이 기계를 만드는 회사는 지구에 하나뿐인가

오십보 백보 2026. 8. 12.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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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경제학 9편] ASML과 EUV — 왜 이 기계를 만드는 회사는 지구에 하나뿐인가

📌 도입 — "새는 헛간에서 시작된 회사"

안녕하세요, 오십보입니다.

ASML·EUV·유일한 회사라는 개념 시각화

6편과 8편에서 EUV 노광장비와 ASML을 여러 번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ASML이 어떻게 이 자리에 올랐는가"는 제대로 다루지 않았습니다. 미리 하나 밝혀두자면, ASML이 지구에서 유일한 회사라는 뜻은 아닙니다. EUV와 관련된 광원·광학·소재를 연구하는 기업과 기관은 여러 곳에 있습니다. 다만 이 모든 기술을 반도체 양산에 쓸 수 있는 하나의 상용 EUV 시스템으로 통합해 판매하는 회사가 ASML 하나뿐이라는 뜻입니다. 니콘·캐논이라는 압도적인 선두주자가 있었는데, 왜 이 회사 하나가 결국 그 자리를 가져갔을까요.


◼ 1부 — 새는 헛간에서 시작한 회사

ASML은 1984년, 네덜란드 전자 대기업 필립스와 반도체 장비 회사 ASM 인터내셔널의 합작 벤처로 출발했습니다. ASML 공식 창업 스토리에 따르면 초기 사무실은 에인트호번의 필립스 사옥 옆 "새는 헛간(leaky shed)"이었고, 필립스 직원 약 47명이 이 새로운 회사에 합류하기로 서명하면서 시작됐습니다.

필립스 헛간에서 시작된 작은 벤처

시작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초기 제품은 신뢰성 문제로 상업적으로 고전했고, 브랜드 인지도도 시장 점유율도 미미했습니다.

 

1980년대 중반 반도체 업계에 불황이 닥치면서 공동 창업자였던 ASM 인터내셔널은 재정적 압박을 받았고, 1988년 보유하고 있던 ASML 지분을 필립스에 매각하면서 발을 뺐습니다. 이후 ASML은 한동안 필립스의 단독 자회사로 있다가, 1995년 기업공개(IPO)를 통해 완전히 독립한 상장회사가 됐습니다.

 

당시 노광장비 시장의 절대 강자는 일본의 니콘과 캐논이었습니다. ASML은 1990년대까지도 시장 후발주자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 2부 — EUV 컨소시엄, 그리고 지켜지지 않은 조건

여기서 이야기의 방향을 바꾼 결정적인 사건이 나옵니다.

 

1990년대 말, 차세대 노광 기술로 EUV(극자외선)가 거론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인텔이 주도해 미국 에너지부 산하 국립연구소들(샌디아, 로렌스 리버모어, 로렌스 버클리)과 협력하는 민간 컨소시엄 EUV LLC가 꾸려졌습니다. 인텔을 비롯해 모토로라·AMD·IBM·마이크론 같은 미국 기업들이 참여했습니다.

: 반도체 삼국지(三國志)의 결의 — 2012년의 투자 협약식 내용 설명

 

일본의 니콘과 캐논은 미국 기업으로의 기술 이전에 대한 우려 때문에 이 컨소시엄 참여가 초기에 막혔습니다. ASML은 1999년에야 조건부로 참여를 허가받았는데, 그 조건은 미국산 부품을 충분히 사용하고 미국 내에 공장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ASML이 이 조건들을 끝내 완전히 충족시키지는 못했음에도 결국 EUV 상용화에 먼저 성공했다는 사실입니다. 미국 주도로 시작된 기술 통제가 결과적으로는 목표한 방향과 다르게 흘러간 셈입니다.

거인의 그늘 아래 — 1990년대의 노광장비 시장 내용 설명

TSMC는 초기부터 ASML의 주요 고객이었고, 이 관계는 이후 EUV 공동 개발 과정에서도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2012년에는 훨씬 더 직접적인 결합이 이뤄졌습니다. ASML이 자금난 속에서도 EUV 개발을 계속하기 위해, 인텔·TSMC·삼성전자를 상대로 한 '고객 공동투자 프로그램'을 진행한 것입니다. 인텔이 15%, TSMC가 5%, 삼성전자가 3%씩, 합계 약 23%의 ASML 지분을 총 38억 5,000만 유로에 사들였고, 세 회사는 여기에 더해 연구개발 자금 약 13억 8,000만 유로를 별도로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아직 완성되지도 않은 기술의 개발비를, 그 기술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고객들이 함께 부담한 셈입니다. 이후 TSMC는 2015년, 삼성전자는 2016년에 각각 지분을 매각했고 인텔도 이후 지분을 상당 부분 줄였습니다.

 

반면 니콘과 캐논은 이 시기 EUV LLC 참여 자체가 막혀 원천기술 접근이 제한됐고, 독자적으로 개발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여기에 막대한 개발비, 기술적 불확실성, 그리고 이미 안정적인 수익을 내고 있던 기존 DUV 사업의 존재까지 겹치면서, 두 회사는 결국 EUV 개발에서 순차적으로 발을 뺐습니다. 캐논은 EUV 상용 장비 개발에서 비교적 일찍 물러섰고, 니콘도 2010년대 초 관련 개발을 접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니콘은 EUV 정면 승부 대신 '디지털 리소그래피' 같은 다른 틈새 영역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전해집니다.


◼ 3부 — EUV는 왜 그렇게 다루기 어려운가

EUV가 어려운 이유는 물리학 자체에 있습니다.

 

EUV는 파장이 13.5nm에 불과한 극자외선입니다. 기존에 쓰던 빛(ArF, 파장 193nm)보다 10배 이상 짧습니다. 이 파장의 빛 자체가 자연에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태양이나 고온 플라즈마 같은 현상에서도 발생합니다. 진짜 어려운 점은, 반도체 공장이 요구하는 수준의 세기·안정성·반복성을 가진 EUV 광원을 매초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물리학의 한계에 도전하다 — EUV 광원과 진공의 광학계

 

실제 상용 EUV 장비는 레이저로 주석(Sn) 액적을 초당 수만 번 가격해 플라즈마를 만들고, 이 플라즈마가 순간적으로 13.5nm 파장의 빛을 방출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이 광원 기술 개발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곳이 미국 회사 사이머(Cymer)였고, 이 회사는 2013년 ASML에 인수됐습니다. 광원 하나를 완성하는 데만도 수십 년이 걸린 셈입니다.

 

또한 이렇게 만든 EUV 빛은 공기를 포함한 거의 모든 물질에 쉽게 흡수돼버리기 때문에, 기존처럼 렌즈로 빛을 굴절시키는 방식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EUV 장비는 특수 코팅된 여러 장의 거울로 빛을 반사시켜 이동시키는 구조를 쓰고, 장비 내부는 진공에 가까운 환경을 유지해야 합니다. 거울을 한 장씩 거칠 때마다 빛의 상당량이 줄어들고, 거울 표면의 극히 미세한 결함조차 웨이퍼 위 회로 결함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EUV의 진짜 난제는 짧은 파장의 빛을 만드는 것 자체보다, 그 빛을 잃지 않고 웨이퍼까지 정확히 실어 나르는 데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3.5nm 파장, 주석 플라즈마, 반사 거울 시스템

한 가지 덧붙이면, EUV가 7nm 이하 공정의 유일한 물리적 해법인 것은 아닙니다. 기존 DUV 장비로도 여러 번 노광을 반복하는 '멀티패터닝' 방식을 쓰면 이론적으로 첨단 공정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경우 공정 단계와 마스크 수, 비용이 크게 늘어나기 때문에, EUV는 '없으면 절대 불가능한 기술'이라기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효율적인 선택'에 가깝습니다.


◼ 4부 — ASML은 부품을 안 만드는 게 아니라, 통합하는 회사다

ASML의 또 다른 특징은 핵심 부품 상당수를 직접 만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정밀 반사 광학계는 독일 자이스(Carl Zeiss SMT)가, 고출력 레이저는 독일 트룸프(TRUMPF)가 맡는 식입니다. 다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광원 기술을 담당했던 사이머만큼은 2013년 아예 인수해 내재화했습니다. 이 정도로 중요한 기술은 외부에 맡기지 않고 직접 품에 안은 것입니다.

부품사 네트워크의 통합자 — 독점적 지위의 완성

그래서 ASML을 "부품을 만들지 않는 회사"로만 이해하면 정확하지 않습니다. ASML의 진짜 경쟁력은 광원·광학계·웨이퍼 스테이지·진공·소프트웨어라는 서로 다른 첨단 기술들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하고, 이 모든 요소의 정밀한 상호작용을 관리해내는 역량에 있습니다. 이 통합 역량과 수백 개 정밀 부품사와의 협력 네트워크가 수십 년에 걸쳐 쌓이면서, 경쟁사가 쉽게 따라올 수 없는 진입장벽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ASML의 노광장비 시장 점유율은 1990년대 시장 후발주자 수준에서, EUV LLC가 구성되던 1990년대 후반 무렵에는 니콘·캐논에 이어 3위권 정도까지 올라섰고, 이후 EUV 상용화 성공과 함께 노광장비 전체 시장에서 압도적인 1위 자리로 올라선 것으로 파악됩니다. 다만 여기서 정확히 구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ASML이 노광장비 시장 전체를 독점하는 것은 아닙니다. 7nm 이하 최첨단 공정에 쓰이는 EUV 상용 시스템만큼은 ASML이 사실상 유일한 공급자이지만, 그보다 성숙한 공정에 쓰이는 DUV 장비 시장에서는 여전히 니콘·캐논이 경쟁자로 남아 있습니다.


◼ 5부 — 장비 하나가 지정학 무기가 된 사연

EUV 상용 시스템의 유일 공급 구조는 자연스럽게 지정학의 도구가 됐습니다.

 

중국에 EUV 장비가 판매되지 않는 것은 미국이 ASML에 직접 명령해서만은 아닙니다. 실제로는 네덜란드 정부가 자체적으로 EUV 수출 허가를 내주지 않는 것이 핵심 장치이고, 미국은 자국 기술·소프트웨어가 포함된 부분에 대한 통제와 동맹국 간 협의를 통해 이런 규제의 폭을 넓혀온 구조입니다. 처음에는 EUV 장비만 제한 대상이었지만, 2023년 무렵부터 네덜란드는 첨단 DUV 장비(ArF 액침 등)에 대해서도 수출 허가제를 도입했고, 이후 일부 DUV 장비의 기존 라이선스마저 취소되는 등 규제 범위가 점점 넓어져 왔습니다.

 

다만 EUV 접근이 막혔다고 해서 중국이 첨단 공정에 아예 도달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중국 SMIC가 DUV 멀티패터닝 방식으로 7nm급 칩을 생산한 사례가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이 경우 공정 단계와 비용이 크게 늘고 수율과 생산 확장성에서는 불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수출통제의 실질적인 목표는 상대방이 첨단 반도체를 물리적으로 절대 만들 수 없게 만드는 것이라기보다, 그 경제적·산업적 확장성을 최대한 낮추는 데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구조 속에서 ASML은 네덜란드라는 한 중견국의 기업이면서도,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초강대국 사이의 협상 테이블에 사실상 당사자로 이름을 올리는 독특한 위치에 서 있습니다.


📌 정리 — 세 줄 요약

첫째, ASML은 필립스 사옥 옆 새는 헛간에서 출발한 작은 벤처였지만, 미국 주도 EUV 연구 컨소시엄에 늦게나마 합류하고 TSMC·인텔·삼성 같은 고객사들의 2012년 공동투자를 등에 업으며 니콘·캐논을 앞질렀습니다.

 

둘째, EUV가 어려운 이유는 이 빛 자체가 자연에 없어서가 아니라, 반도체 공장이 요구하는 안정적인 광원을 대량으로 만들고 손실 없이 웨이퍼까지 실어 나르기가 극도로 어렵기 때문이며, ASML은 핵심 광원 기술(사이머)만은 직접 인수해 내재화하면서 이 시스템 전체를 통합해냈습니다.

 

셋째, EUV 상용 시스템의 유일 공급 구조는 미국과 네덜란드의 대중국 수출통제 전략의 핵심 수단이 됐고, 그 결과 ASML은 한 기업의 범위를 넘어 미·중 반도체 패권 경쟁의 실질적인 당사자가 됐습니다.


💬 오십보 한마디

새는 헛간에서 47명으로 시작한 회사가 지금은 전 세계 첨단 반도체 생산의 핵심 병목을 쥐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들여다보면, ASML이 처음부터 압도적인 기술로 시장을 평정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원천기술·독일의 광학·미국의 광원 회사·아시아 고객사들의 장기 투자가 하나둘 결합되며 만들어진 결과에 가깝습니다. 독점이라는 결과만 보면 거대해 보이지만, 그 시작과 과정은 언제나 여러 나라·여러 회사의 합작이었다는 사실이 이 이야기의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협력의 결정체, 지구촌의 합작품

다음 10편에서는 세계 반도체 클러스터 — 실리콘밸리·대만·일본·용인이 각자 어떻게 자신만의 생태계를 키워왔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오늘도 한 걸음, 오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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