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용유의 경제학 15편] 잊혀진 기름들 — 동백·쪽동백·피마자·생강나무·땅콩, 우리가 몰랐던 전통 기름의 경제학
[식용유의 경제학 15편] 잊혀진 기름들 — 동백·쪽동백·피마자·생강나무·땅콩, 우리가 몰랐던 전통 기름의 경제학
안녕하세요, 오십보입니다.
이 시리즈를 시작한 것은 참기름 한 병이었습니다. 방앗간에서 북미 마트 진열대까지, 한 방울의 경제학이었습니다.
1편부터 14편까지 읽어오시면서 이런 생각을 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쓰는 기름들은 대부분 외국 원료이거나, 외국에서 개발된 기름이거나, 외국 브랜드였습니다. 팜유는 인도네시아, 카놀라는 캐나다, 올리브유는 지중해, 아보카도유는 멕시코.
그렇다면 한반도에는 원래 어떤 기름이 있었을까요.
오늘 15편은 지금은 거의 잊혀졌지만, 한때 이 땅의 밥상과 머릿결과 등불을 책임졌던 기름들을 읽어보겠습니다. 동백기름, 쪽동백기름, 생강나무기름, 피마자기름, 땅콩기름. 그리고 그 기름들이 왜 사라졌는지, 일부는 왜 다른 나라에서 프리미엄이 됐는지도 함께 읽겠습니다.
이 시리즈의 출발점이 궁금하다면 → [식용유의 경제학 1편] 참기름 — 방앗간에서 북미 마트 진열대까지 한국 땅에서 나온 또 다른 기름 들기름 이야기 → [식용유의 경제학 2편] 들기름 — 세계에서 한국만 아는 기름
◼ 기름에도 위계가 있었다 — 조선의 기름 신분제
조선 시대 부엌과 화장대의 기름 풍경을 먼저 그려보겠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참기름, 들기름, 콩기름을 주로 사용하였습니다. 튀김요리를 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한 건 콩기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요리 기름의 이야기입니다. 몸단장을 위한 기름, 등불을 밝히는 기름의 세계는 달랐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주로 이용된 식용유는 참기름·들기름·콩기름이고 면실유도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화장용·머릿기름 시장은 별개였습니다. 동백기름이 귀하고 비쌌기 때문에, 신분과 경제력에 따라 쓰는 기름이 달랐습니다.
대략적인 위계를 그리면 이렇습니다.
신분/계층 머릿기름
| 궁중·상류 양반가 | 동백기름 (최고급) |
| 중인·일반 양반가 | 쪽동백기름·생강나무기름 |
| 일반 백성 | 들기름·콩기름 등 가용한 기름 |
쪽동백나무는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자라며 머릿기름 말고도 호롱불 기름으로도 쓰였습니다. 쪽동백나무는 때죽나무, 생강나무 씨와 함께 동백기름을 쓸 만한 지체 높은 마님이 아닌 대부분의 옛 여인들이 널리 이용하였습니다.
기름 한 병에도 계급이 담겨 있었습니다.
◼ 동백기름 — 같은 기름, 다른 이름의 경제학
동백나무(Camellia japonica)의 씨앗에서 짠 기름이 동백기름입니다. 주로 제주도와 남해안 지역에서 자라는 상록수입니다.
동백기름은 오메가-9(올레산)이 약 80% 이상을 차지합니다. 올리브유와 비슷한 지방산 구성이어서 산화가 느리고 안정성이 높습니다. 이 특성이 머릿기름으로서의 가치를 만들었습니다. 두발에 바르면 윤기가 오래 유지되고, 공기와 닿아도 쉽게 산패하지 않습니다.
조선 궁중에서는 동백기름이 고급 머릿기름으로 쓰였습니다. 등불 연료, 방청유(금속 녹 방지), 제례 음식의 튀김 기름까지 다양하게 활용됐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이 기름이 전혀 다른 이름을 얻었습니다.
**쓰바키오일(椿油, つばきオイル)**입니다.
수 세기 동안 일본 게이샤들의 아름다움의 비밀은 바로 동백오일이었습니다. 게이샤들은 동백오일을 이용하여 진한 메이크업을 지우거나, 피부 깊숙이 영양을 공급하여 맑고 투명한 도자기 같은 피부와 빛나고 건강한 머리카락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교토 기온에 위치한 카즈라세이는 에도 시대부터 영업해 왔으며, 100% 순수 특제 동백기름은 규슈 고토 열도에 있는 자사 농장에서 손수 채취하고 선별한 동백씨를 전통 방식으로 사용하여 일본 화지로 여과한 후 기름을 짜내어 만듭니다.
일본에서 동백기름은 게이샤, 스모 선수, 가부키 배우의 헤어 스타일링 기름으로 에도 시대부터 브랜드화됐습니다. 고토 열도산 동백씨를 전통 방식으로 압착한 기름이 프리미엄 제품으로 팔립니다. 지금도 일본 헤어케어 시장에서 쓰바키오일은 "전통과 자연"이라는 서사를 달고 세계 시장에 수출됩니다.
한국은 어떨까요. 동백기름은 한국 화장품·헤어케어 시장에서 아직 주류 원료가 아닙니다. 제주 동백기름을 원료로 한 프리미엄 헤어 오일 제품이 일부 시장에 나와 있지만, 일본의 쓰바키오일이 이미 구축한 글로벌 브랜드 인지도에 비하면 걸음마 수준입니다.
같은 씨앗에서 나온 기름입니다. 한국에서는 전통 소재로 남아있고, 일본에서는 세계 시장의 헤어케어 프리미엄 기름이 됐습니다. 차이는 브랜딩과 유통 투자였습니다.
이름이 어떻게 계급을 담아왔는지, 언어가 위계를 만드는 방식이 궁금하다면 → [단어의 서재 26편] 陛下·殿下·閣下 — "아래 下" 하나로 위계를 만든 언어
◼ 쪽동백기름 — 서민의 동백, 사라진 대체재
쪽동백나무[학명: Styrax obassia, 때죽나무과]는 '낙엽이 지는 넓은 잎 키가 작은 나무'다. 마침 품질은 조금 떨어져도 동백기름을 대용하기에 크게 모자람이 없는 쪽동백나무를 찾아냈다. 이것으로 씨앗기름을 짜서 두루 사용한 것이다.
쪽동백나무는 동백나무와 완전히 다른 식물입니다. 동백나무는 차나무과(Theaceae)이고, 쪽동백나무는 때죽나무과(Styracaceae)입니다. 학명도 다르고, 상록과 낙엽의 차이도 있습니다. 다만 씨앗에서 기름이 나온다는 공통점 때문에 동백기름의 대체재로 오래 쓰였습니다.

'쪽'이란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으나 쪽문, 쪽배처럼 '작다'라는 뜻입니다. 동백나무보다 열매가 작은 나무란 의미로 쪽동백나무가 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중국과 일본, 한국 산과 들의 숲 가장자리에 분포하며,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비교적 흔히 자랍니다. 동백기름이 귀했던 내륙 지방이나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여인들은 쪽동백나무 씨앗에서 기름을 짜 머릿기름으로, 또는 호롱불 연료로 썼습니다.
지금은 화장품이나 식품 원료로 상업화된 사례가 거의 없습니다. 쪽동백나무는 정원수·가로수로 심어지는 관상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꽃은 때죽나무와 비슷하지만, 크기가 더 크고, 잎도 넓습니다. 씨앗에서 기름을 짜는 전통이 끊겼습니다.
◼ 생강나무기름 — 강원도·경상도 여인의 머릿기름
생강나무(Lindera obtusiloba, 녹나무과)는 이른 봄 산에서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나무입니다. 잎과 줄기에서 생강 향이 나서 생강나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에서 "노랗고 향기로운 동백꽃"이 실은 동백나무가 아닌 생강나무 꽃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강원도 방언으로 생강나무를 '동백나무'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생강나무 씨는 쪽동백나무 씨와 함께 동백기름을 쓸 만한 지체 높은 마님이 아닌 대부분의 옛 여인들이 널리 이용하였습니다.
생강나무 씨앗에서 짠 기름은 '산동백기름'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올레산이 풍부해 동백기름과 비슷한 특성이 있습니다. 동백나무가 잘 자라지 않는 내륙 산간 지역, 특히 강원도와 경상도 일부 지역에서 머릿기름으로 썼습니다.
지금은 생강나무기름을 상업적으로 생산하는 곳이 거의 없습니다. 수확량이 적고, 씨앗 채취와 압착이 번거롭기 때문입니다.
◼ 피마자기름 — 먹을 수 없는 기름의 광범위한 쓰임새
피마자(Ricinus communis, 대극과)는 아주까리라고도 부릅니다. 인도·소아시아·북아프리카 원산으로, 한국에서는 한해살이 풀로 자랍니다.
피마자기름(아주까리기름)은 이 시리즈에서 다룬 다른 기름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식용이 아닙니다. 피마자 씨앗에는 리신(Ricin)이라는 강력한 독성 단백질이 있습니다.

피마자유의 가장 큰 특징은 전체 지방산의 약 90%를 차지하는 리시놀레산이라는 독특한 하이드록시 지방산입니다. 이 성분 덕분에 피마자유는 다른 식물성 기름과는 구별되는 물리적, 화학적 특성을 가지며, 고대부터 의약품, 윤활유, 조명용 기름 등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피마자 씨앗에는 리신이라는 강력한 독성 단백질이 있지만, 리신은 기름에 녹지 않고 열에 매우 약합니다. 기름을 추출하고 가열하여 정제하는 과정에서 리신은 완전히 파괴되고 제거되므로, 시판되는 피마자유는 인체에 무해합니다.
피마자기름의 쓰임새는 광범위합니다.
의약품: 변비 치료를 위한 완하제(설사제)로 수천 년 역사가 있습니다. 기원전 2000년 무렵부터 인도에서는 피마자 씨 기름을 등불의 기름으로 썼으며, 약으로도 썼습니다.
화장품: 립스틱·립글로스의 주요 원료입니다. 점성이 높고 피부에 잘 밀착되며 광택을 냅니다. 피마자유가 없으면 현대 립스틱이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항공기 윤활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로터리 엔진(회전형 항공기 엔진)의 윤활유로 피마자기름이 쓰였습니다. 당시 광물성 오일보다 점도 특성이 엔진에 더 적합했기 때문입니다.
산업용: 나일론의 원료, 고성능 윤활유, 도료, 바이오디젤, 생분해성 플라스틱의 원료로 지금도 산업계에서 중요한 기름입니다.
오늘날에는 의약품과 화장품은 물론, 폴리머, 바이오디젤, 도료 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필수적인 원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피마자기름은 식용이 아니라는 이유로 우리의 식탁 이야기에서 빠져 있었지만, 사실 가장 광범위한 산업적 쓰임새를 가진 기름 중 하나입니다. 이것이 Oil의 두 얼굴이라는 이 시리즈의 테마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먹는 기름과 태우는 기름이 어떻게 분리됐는지는 → [식용유의 경제학 13편] 라드와 기름의 두 얼굴 — 먹는 기름과 태우는 기름이 갈라진 날
◼ 땅콩기름 — 조지 워싱턴 카버와 호남의 전통 기름
땅콩기름(Peanut Oil, 낙화생유)은 세계 식용유 역사에서 흥미로운 위치를 차지합니다.

19세기 말 미국에서 조지 워싱턴 카버(George Washington Carver)는 노예제 폐지 이후 미국 남부의 면화 단작으로 피폐해진 토양을 살리기 위해 땅콩 재배를 권장했습니다. 그는 땅콩에서 300가지 이상의 제품을 개발했는데, 그 중 하나가 땅콩기름이었습니다. 카버는 식물의 잠재력을 산업에 연결한 선구자로, 땅콩기름이 식품·화장품·윤활유로 활용될 수 있음을 보여줬습니다.
한국에서 땅콩기름은 주로 호남 지방에서 전통적으로 써온 기름입니다. 전라도에서 땅콩 재배가 비교적 활발했고, 참기름·들기름보다 저렴한 대안으로 전이나 볶음 요리에 쓰였습니다. 고소하면서 참기름보다 순한 향이 전라도 일부 요리에 독특한 풍미를 만들었습니다.
발연점이 약 230°C로 높아 튀김용으로도 적합합니다. 중국 음식에서 땅콩기름은 지금도 볶음·튀김의 기본 기름입니다. 베트남·태국 요리에서도 땅콩기름이 쓰입니다. 세계적으로는 중소 규모이지만 뚜렷한 문화권이 있는 기름입니다.
◼ 왜 사라졌는가 — 전통 기름의 몰락 3가지 이유
이 기름들이 사라진 이유는 맛이나 효능이 아니었습니다.
첫째, 공업화된 기름의 가격 경쟁입니다. 20세기 중반 이후 콩기름·카놀라유·옥수수기름이 대량 생산·대량 유통 구조로 가격을 낮추면서, 소량 생산에 의존하는 전통 기름들이 가격 경쟁에서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둘째, 수확·압착 기술의 기계화 실패입니다. 동백씨, 쪽동백씨, 생강나무씨는 모두 소량씩 손으로 수확해야 하는 작물입니다. 올리브나 참깨처럼 기계화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노동력 비용이 올라갈수록 이 기름들의 경제성이 떨어졌습니다.
셋째, 브랜딩 투자의 부재입니다. 동백기름이 일본에서 쓰바키오일로 세계 시장에 나간 반면, 한국에서는 전통 소재로만 머물렀습니다. 문화적 자산을 경제적 가치로 전환하는 브랜딩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
제주의 동백기름 생산 농가가 소규모로 늘고 있습니다. 제주 동백기름을 원료로 한 헤어케어·스킨케어 제품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K-뷰티의 성장이 한국 전통 원료에 대한 재발견을 촉진하고 있습니다. 쪽동백기름도 소수의 전통 기름 연구자들이 복원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 오십보의 정리
15편에 걸쳐 우리는 세계 기름 지도를 읽어왔습니다.

참기름에서 시작해 들기름, 옥수수기름, 카놀라유, 올리브유, 올리브나무, 아보카도유, 팜유, 코코넛오일, 해바라기씨유, 포도씨유, 면화유, 라드와 Oil의 두 얼굴, 대두유, 그리고 오늘 잊혀진 전통 기름들까지.
오늘 읽은 기름들이 사라진 이유는 성능이 아니었습니다. 브랜딩과 유통과 기계화의 실패였습니다. 동백기름이 일본에서 쓰바키오일로 살아남은 것이 이것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기름들을 다시 읽는 지금, 어쩌면 재발견의 기회가 있을 수 있습니다. K-뷰티가 세계로 나가는 시대에, 한국 전통 기름 원료도 그 흐름을 탈 수 있습니다.
다음 편이자 이 시리즈의 마지막 편에서는 기름의 역사 전체를 고래기름으로 닫겠습니다. 19세기 세계를 밝힌 고래기름에서 시작해, 석유가 기름의 역사를 어떻게 바꿨는지, 그리고 우리가 지금 이 시리즈에서 읽어온 기름들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까지 총정리하겠습니다.
오늘도 한 걸음, 오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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