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용류의 경제학 2편] 들기름 — 세계에서 한국만 아는 기름, 그 고집의 경제학
안녕하세요, 오십보입니다.
지난 편에서 참기름을 읽었습니다. 참기름 한 병에 담긴 5,500년의 여정과, 자급률 8%라는 냉정한 숫자를 들여다봤습니다.
그런데 참기름을 쓰고 나서 마음에 걸리는 기름이 하나 있었습니다.
마트 기름 코너에서 참기름 옆에 언제나 나란히 놓여 있는 그것. 사람들이 참기름만큼 자주 집지는 않지만, 알 만한 사람은 꼭 집어가는 기름. 뚜껑을 열면 참기름과는 전혀 다른 풋풋하고 묵직한 냄새가 올라오는 기름.
들기름입니다.

오늘 오십보는 들기름 앞에서 멈춰보겠습니다. 참기름보다 덜 알려진 이 기름 안에, 어쩌면 더 흥미로운 경제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지구에서 한국만 아는 기름
들기름 이야기를 시작할 때 가장 먼저 짚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전 세계 식용유 지도를 펼쳐보면 들기름이 없습니다.

올리브유는 지중해 70개국에 걸쳐 소비됩니다. 참기름은 한국·일본·중국·중동·인도를 아우릅니다. 해바라기유는 유럽 전역, 팜유는 동남아와 아프리카, 콩기름은 미주 대륙. 각자의 영역이 있습니다.
그런데 들기름(들깨 기름, Perilla oil)을 주력 식용 조미기름으로 쓰는 나라는 지구상에서 한국이 사실상 유일합니다. 일본에도 들깨 계열 식물(에고마)이 있지만, 그것으로 기름을 짜 요리에 쓰는 문화는 없습니다. 중국도 들깨 원산지 중 하나이지만 들기름이 식탁에서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이 기묘한 사실에서 오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왜 이 기름은 한국에서만 살아남았을까요.
들깨, 척박함을 선택한 식물
들기름의 원료인 들깨(Perilla frutescens)는 동남아시아와 인도 고지가 원산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위키백과와 농촌진흥청 등 국내외 복수의 자료가 이 지역을 원산지로 기술하고 있으며, 한반도에는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이미 들깨 종자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통일신라시대에 재배했다는 문헌 기록이 있으며, 조선시대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경기도와 충청도의 토산품으로도 올라 있습니다.
그런데 들깨는 특이한 식물입니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랍니다. 배수가 나쁜 논두렁, 반그늘의 산기슭, 습한 밭 가장자리. 참깨가 배수 좋은 따뜻한 양지를 선호하는 것과 정반대입니다. 산지가 국토의 70%를 차지하는 한반도에서, 참깨를 심기 어려운 곳에도 들깨는 자랐습니다.
동시에 들깨는 수확이 까다롭습니다. 씨앗이 너무 작고 가벼워서 기계 수확이 어렵고, 성숙 시기가 들쭉날쭉해서 지금도 대부분 손으로 거둡니다. 이 수확의 어려움이 들기름이 세계화에 실패한 결정적 이유 중 하나입니다. 올리브, 참깨, 해바라기씨는 대규모 기계 수확이 가능해 수출 상품이 됐지만, 들깨는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기 어렵습니다.
한반도는 들깨에게 적합한 땅이었지만, 들깨는 한반도 밖으로 나가기 어려운 식물이었습니다. 이 조합이 들기름을 한국에만 가두어 놓은 첫 번째 원인입니다.
들기름의 역설 — 최고의 영양이 최단 수명을 만들다
들기름에는 놀라운 성분이 있습니다.
오메가-3 지방산(알파-리놀렌산, ALA)입니다. 들기름 전체 지방 중 오메가-3 비중은 약 54~64%에 달합니다. 삼성서울병원 자료에 따르면 61.3% 수준입니다. 이는 오메가-3 보충제로 많이 쓰이는 아마씨유와 비슷하거나 높은 수준이며, 올리브유(0.5~1%)와는 비교가 불가능한 차이입니다.

식용유 오메가-3(ALA) 함량
| 들기름 | 약 54~64% |
| 아마씨유 | 약 55~60% |
| 카놀라유 | 약 9~11% |
| 올리브유(EVOO) | 약 0.5~1% |
| 참기름 | 약 0.3~0.5% |
| 해바라기유 | 약 0.2% 미만 |
그런데 이 탁월한 오메가-3 함량이 동시에 들기름의 치명적 약점입니다.
불포화도가 높을수록 산화 속도가 빠릅니다. 오메가-3는 이중결합이 많은 구조라 산소와 반응하기 쉽습니다. 들기름은 개봉 후 실온에 두면 빠르게 산패합니다. 반드시 냉장 보관이 필요하며, 개봉 후 1~2개월 안에 쓰는 것이 좋습니다. 참기름이 실온에서 수개월을 버티는 것과 완전히 다른 보관 조건입니다.
이 짧은 유통기한이 들기름의 국제 물류를 막습니다. 상온에서 수개월씩 이동해야 하는 해운 컨테이너 환경에서 들기름은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품질이 저하될 위험이 있습니다. 영양이 뛰어날수록 수명이 짧아지는 역설이 들기름을 국내에 묶어놓은 두 번째 원인입니다.
생들기름 vs 볶음들기름 — 같은 씨앗, 두 개의 철학
마트에서 들기름 코너를 자세히 보면 두 가지가 나란히 있습니다.

볶음들기름은 우리가 흔히 아는 들기름입니다. 들깨를 강하게 볶은 뒤 압착합니다. 짙은 황금빛~갈색이고, 향이 강합니다. 나물 무침, 막국수, 두부조림에서 그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생들기름은 볶지 않고 냉압착으로 만듭니다. 색이 옅고, 향도 훨씬 부드럽습니다. 볶음 과정에서 일부 파괴될 수 있는 오메가-3와 항산화 물질이 더 잘 보존됩니다. 대신 향이 은은해서 처음 접하면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건강 효능의 관점에서는 생들기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 요리에서는 볶음들기름의 고소한 향이 압도적으로 선호됩니다. 두 제품은 같은 씨앗에서 나왔지만 전혀 다른 소비자를 향합니다. 하나는 한국 부엌의 전통을, 다른 하나는 건강 보충제 시장의 미래를 향해 있습니다.
들기름 산업의 지형 — 조용한 시장의 구조
들기름 시장은 참기름 시장보다 작습니다. 국내 조미기름 시장 전체 약 5,000억 원 규모 중 참기름이 약 2,000~2,500억 원, 들기름은 그보다 작은 규모를 차지합니다.
시장 구조는 참기름과 유사합니다. 대상(청정원), CJ제일제당(백설), 오뚜기 등 대형 식품기업이 대형마트 유통 채널을 지배하는 가운데, 국산 들깨·소농 직판 프리미엄 들기름이 온라인을 중심으로 별도 시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들기름 시장에는 참기름보다 더 복잡한 원산지 문제가 있습니다.
국내 들깨 자급률은 참깨 자급률(약 8~12%)보다 다소 높은 편으로 추정되지만, 수입의 상당 비중이 중국산입니다. 국산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들어오는 중국산 수입 들깨가 국내 시장에서 원산지 구별이 어려운 혼재 구도를 만들어냅니다. 참기름 편에서 읽었던 원산지 프리미엄 문제가 들기름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합니다.
들깨 농업의 구조적 위기 — 손이 너무 많이 가는 작물
들기름 시장의 또 다른 구조적 문제는 들깨 재배 농가의 고령화입니다.
들깨는 기계화가 어렵습니다. 파종, 이식, 수확 모두 사람 손이 많이 필요한 작물입니다. 한국 농촌 인구가 급속히 고령화되면서, 손이 많이 가는 들깨 재배를 포기하고 기계화가 쉬운 다른 작물로 전환하는 농가가 늘고 있습니다.
옥수수의 경제학 1편에서 읽었듯이, 공급망이 흔들리면 가격이 오르고, 가격이 오르면 수요가 줄고, 수요가 줄면 재배 농가는 더 줄어드는 악순환이 시작됩니다. 참기름에서 자급률 8%라는 숫자를 읽었는데, 들기름도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들기름의 반격 — 오메가-3의 언어로 세계를 두드리다
그런데 최근 흥미로운 변화가 생기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식물성 오메가-3 수요가 늘고 있습니다. 채식주의자와 비건 인구가 증가하면서 생선에서 얻던 오메가-3를 식물성으로 대체하려는 수요가 커졌습니다. 아마씨유가 그 수요를 일부 채워왔는데, 들기름의 오메가-3 함량이 아마씨유와 같거나 더 높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서양 건강 식품 시장에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시장 조사 기관들에 따르면 글로벌 들깨 오일 시장은 2026년부터 2032년 사이 연평균 약 10%대의 성장률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다만 기관마다 규모 추정치의 편차가 크기 때문에 단일 수치보다는 "빠르게 성장하는 소규모 프리미엄 시장"으로 읽는 것이 정확합니다.
K-푸드 열풍도 이 흐름을 돕고 있습니다. 참기름 수출이 최근 연속으로 두 자릿수 성장을 기록하는 가운데, 들기름도 같은 흐름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국내 일부 들기름 생산 업체가 일본에 생들기름을 수출한 사례도 보도됐습니다.
한반도 밖으로 나가지 못했던 기름이, 수천 년 만에 처음으로 수출 항로를 열고 있습니다.
들기름이 세계화되려면 — 두 가지 숙제
그러나 낙관하기는 이릅니다. 들기름 세계화에는 여전히 두 가지 구조적 숙제가 있습니다.

첫째, 산패 문제입니다. 냉장 콜드체인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소용량 포장에 불활성 기체(질소) 충전, 차광 포장이 필수입니다. 이 비용이 올라가면 가격 경쟁력이 떨어집니다. 올리브유처럼 상온 대형 용기 판매는 들기름에게는 불가능한 전략입니다.
둘째, 인지도 문제입니다. 'Perilla oil'은 서양 소비자에게 낯선 이름입니다. 한국 음식 문화의 확산이 전제되어야 들기름 수요가 생깁니다. 깻잎이 K-BBQ와 함께 해외에 알려진 것처럼, 들기름도 한국 음식 문화를 타고 들어가야 합니다.
두 조건이 동시에 갖춰져야 가능한 방정식입니다. 쉽지 않지만, 불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참기름과 들기름 — 같은 선반, 다른 운명
참기름 편을 마무리할 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참기름은 실크로드를 타고 온 기름이라고.
그렇다면 들기름은 실크로드를 타지 않은 기름입니다. 아무도 가져가지 않았고, 수출되지 않았고, 그래서 오히려 한반도에서만 수천 년을 버텼습니다.
참기름이 세계화에 성공한 기름이라면, 들기름은 세계화를 거부한 기름입니다. 세계가 선택하지 않았기에 한국이 혼자 품어온 기름. 그 고집의 결과가 지금 한국 부엌에서 나물을 무치고 막국수 위에 한 바퀴를 도는 그 향이 됩니다.
흥미로운 역설이 하나 있습니다. 세계화에 실패한 기름이 지금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오메가-3 식물성 오일 시장에서 뒤늦게 주목받고 있습니다. 수천 년을 기다린 셈입니다.
오십보의 정리
들기름 한 병 안에는 세 가지 구조가 있습니다.
첫째, 지형의 경제학입니다. 한반도의 산지 지형이 들깨를 선택했고, 들깨의 수확 어려움이 세계화를 막았습니다. 땅의 조건이 기름의 운명을 결정했습니다.
둘째, 영양의 역설입니다. 오메가-3 함량이 식물성 오일 중 최고 수준이지만, 그 불포화도 때문에 산패가 가장 빠릅니다. 최고의 영양이 가장 짧은 유통기한을 만들었습니다.
셋째, 문화와 시장의 공진화입니다. 한국 발효 음식 문화와 들기름은 수천 년에 걸쳐 서로를 선택했습니다. 그 공진화의 결과가 지금 K-푸드라는 이름으로 세계 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참기름과 들기름이 나란히 놓인 마트 선반을 다시 보게 됩니다. 하나는 실크로드를 타고 세계에서 온 기름, 다른 하나는 수천 년 동안 한국 땅을 떠나지 않은 기름. 같은 선반, 다른 역사, 그리고 지금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늘도 한 걸음, 오십보.
함께 읽으면 좋은 글
들기름이 어떻게 한국 밥상을 지켜왔는지 음식의 시선으로 읽고 싶다면 → [이야기 팬트리] 들기름, 세계에서 한국만 아는 기름의 비밀 (쫀쿠)
참기름의 5,500년 여정과 국산 자급률 구조 → [기름의 경제학 1편] 참기름 — 방앗간에서 북미 마트 진열대까지 (오십보)
같은 원료가 원산지 브랜딩으로 명품이 되는 구조 → [편의점 서가] 명품 버터 — AOP가 버터를 명품으로 만드는 방식 (이안박)
공급망이 흔들릴 때 밥상이 흔들리는 구조 → [옥수수의 경제학 1편] 한 알이 밥상에서 주유소로 간 이유 (오십보)
태그
#들기름 #들깨 #들기름경제학 #오메가3 #PerillaOil #오십보 #쉬어가는이야기 #식용류의경제학 #식물성오메가3 #조미기름시장 #들기름수출 #생들기름 #농업고령화 #공급망 #K푸드 #식용기름시장
'오십보의 쉬어가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유대인 경제 14편 — 완결] 흩어진 자들의 지도 — 디아스포라, 가장 오래된 글로벌 네트워크 (0) | 2026.07.04 |
|---|---|
| [유대인 경제 13편] 유대인이 특별한 게 아니었다 — 계약·신용·네트워크라는 제도가 만든 성공 (0) | 2026.07.01 |
| [식용류의 경제학1] 참기름 — 방앗간에서 북미 마트 진열대까지, 한 방울의 경제학 (1) | 2026.06.27 |
| [유대인 경제 12편] 차고에서 시작된 세계 — 실리콘밸리, 배신과 히피와 이민자의 역사 (0) | 2026.06.26 |
| [유대인 경제 11편]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탄생 — 이민 상인의 영화 제국 (0) | 2026.06.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