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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용유의 경제학 16편 · 마지막] 고래기름 — 세상을 밝히다 사라진 기름, 그리고 기름의 역사가 우리에게 남긴 질문

오십보 백보 2026. 8. 10.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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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용유의 경제학 16편 · 마지막] 고래기름 — 세상을 밝히다 사라진 기름, 그리고 기름의 역사가 우리에게 남긴 질문


안녕하세요, 오십보입니다.

 

식용유의 경제학 마지막 편입니다.

 

1편 참기름에서 시작해 들기름, 옥수수기름, 카놀라유, 올리브유, 올리브나무, 아보카도유, 팜유, 코코넛오일, 해바라기씨유, 포도씨유, 면화씨유, 라드와 Oil의 두 얼굴, 대두유, 잊혀진 전통 기름들까지. 15편에 걸쳐 기름의 세계를 읽어왔습니다.

 

마지막은 고래기름입니다.

 

고래기름은 우리 식탁에 없습니다. 지금 마트에서 살 수 있는 기름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기름을 마지막 편으로 고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쓰는 기름들이 존재하게 된 것이, 어느 정도는 고래기름이 사라진 자리를 채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래기름의 역사 안에 이 시리즈 전체를 꿰뚫는 질문이 있기 때문입니다.


◼ 기름의 세계를 뒤바꾼 동물 — 향유고래

향유고래(Physeter macrocephalus)는 지금도 살아있는 가장 큰 이빨고래입니다. 수컷 성체는 길이 14~18m, 무게 45~50톤에 달합니다.

[시대의 등불] 19세기 인류의 조명 문명을 지탱한 거인, 향유고래

그런데 이 거대한 동물이 19세기 인류의 조명 문명을 지탱했습니다.

 

향유고래의 거대한 머리 공간에는 **경뇌유(鯨腦油, Spermaceti)**라는 특별한 기름이 가득합니다. 18세기와 19세기 초반, 향유고래의 머리에서 추출한 경뇌유는 최고의 조명 연료였습니다. 그을음과 냄새가 거의 없고, 매우 밝은 빛을 내어 등대의 등불이나 상류층의 양초로 애용되었습니다.

 

경뇌유로 만든 양초는 당시 조명 품질의 기준이 됐습니다. 지금도 광도 단위 '칸델라(candela)'의 어원이 양초(candela)이고, 19세기 경뇌유 양초가 그 기준 광원이었습니다.

 

향유고래의 내장에서는 또 다른 귀한 것이 나옵니다. **용연향(龍涎香, Ambergris)**입니다. 고래 소화기관에서 만들어지는 이 물질은 향수의 보향제(향기를 오래 지속시키는 물질)로 금보다 비싼 값에 거래됐습니다. 고래 한 마리가 조명 연료, 화장품 원료, 향수 재료, 기계 윤활유를 동시에 내어주는 산업 자원이었습니다.


◼ 낸터킷의 황금기 — 포경산업이 세상을 움직인 시대

1712년 향유고래의 기름이 양초의 원료로 사용되면서 에너지 전쟁이 가속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미국의 경제는 육지에서는 목재나 금광산업, 그리고 바다에서는 포경산업이 활발했습니다. 주로 사냥의 대상이 된 고래는 향유고래로, 큰 고래 한 마리를 포획하면 만 리터 이상의 고래기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낸터킷의 황금기] 기름을 찾아 대양을 누비던 포경선단의 거친 항해

 

당시 미국(특히 뉴잉글랜드 지역)의 포경업은 국가 5대 산업 중 하나였을 정도로 거대한 부를 창출했습니다.

 

매사추세츠 주 낸터킷 섬이 그 중심이었습니다. 섬에서 출항한 포경선들이 대서양을 건너고, 희망봉을 돌고, 태평양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미국의 포경선(전체 872척 중 652척 차지)은 향유고래를 쫓아 150년간 세계의 바다를 누볐습니다.

 

그 포경선 중 하나가 1820년 에섹스(Essex)호였습니다. 이 배는 태평양에서 거대한 향유고래에게 들이받혀 침몰했습니다. 20명의 선원이 표류하다 8명만 살아돌아왔습니다. 이 사건이 훗날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소설 《모비 딕(Moby Dick)》의 모델이 됐고, 2015년에는 영화 〈바다 한가운데서(In the Heart of the Sea)〉로 만들어졌습니다.

 

포경산업의 규모는 지정학도 움직였습니다. 1820년부터 수년간 일본 근해에 향유고래 떼가 출현하자 미국은 100여 척의 포경선을 파견했고, 1853년 동인도함대사령관 페리 제독은 태평양 미국 포경선의 기착항구가 필요하다고 일본의 개항을 강요했습니다.

 

고래기름을 위해 일본이 개항을 요구받았습니다. 기름이 역사를 바꾼 것입니다.


◼ 남획의 경제학 — 공유지의 비극

포경산업의 황금기는 스스로를 무너뜨리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 초 전 세계 해역에서 향유고래가 약 110만 마리 서식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포경이 본격화하면서 개체 수가 빠르게 줄었습니다.

[남획의 경제학] 끝없는 욕망이 부른 참극, 스스로 자원 기반을 무너뜨린 포경산업

 

포경이 시작된 이후 2.4년이 지난 시점에서 포획 성공률이 무려 58% 급감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고래들이 포경선의 패턴을 학습해 피하기 시작했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연안의 고래가 사라지자 포경선들은 더 먼 바다로 나가야 했습니다. 항해 거리가 길어질수록 비용이 올랐고 수익성이 떨어졌습니다. 고래 한 종을 쫓는 산업이 스스로의 자원 기반을 소진시키는 구조였습니다.

 

경제학에서는 이것을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the Commons)**이라고 합니다. 모두에게 열려 있는 자원을 각자가 최대한 활용하려다 결국 자원 자체가 고갈되는 현상입니다. 19세기 포경산업이 그 교과서 사례가 됐습니다.


◼ 석유가 고래를 구했다 — 역사의 가장 아이러니한 반전

1859년 8월 27일, 에드윈 드레이크(Edwin Drake)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타이터스빌에서 지하 21미터 지점에서 석유를 뽑아올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첫날 생산량은 하루 약 25배럴. 소박한 출발이었습니다.

[구원의 아이러니] 고래기름 양초를 밀어낸 석유 등유의 빛 — 멸종 위기에서 고래를 구하다

 

그런데 이것이 세상을 바꿨습니다.

 

석유를 정제하면 나오는 **등유(Kerosene)**가 고래기름 양초와 경쟁하기 시작했습니다. 등유는 고래기름보다 훨씬 저렴했고, 공급이 안정적이었습니다. 석유 등유 램프가 보급되면서 고래기름 양초 시장이 빠르게 무너졌습니다.

 

그 결과, 고래류를 멸종 위기에서 구해낸 일등 공신은 석유화학의 발전이었습니다. 석유 채굴과 원유 정제 산업을 통해 고래기름의 수요가 크게 줄었고, 따라서 포획량도 줄어들었으며 이로 인해 고래 숫자도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향유고래 개체수는 36만 마리로 추산됩니다. 19세기 초 추정치의 3분의 1 수준이지만, 포경이 절정이던 시기와 비교하면 회복된 수치입니다.

 

환경을 오염시키는 석유가 고래를 살렸습니다. 역사에서 드문 아이러니입니다.


◼ 고래기름이 남긴 자리 — 이 시리즈가 다룬 기름들의 계보

고래기름이 빠진 자리를 채운 것들이 있습니다.

고래기름이 남긴 빈자리, 식물성 기름의 계보학

 

조명·연료: 석유 등유, 이후 전기. 지금은 재생에너지로 이어집니다.

 

윤활유: 광물성 오일로 대체됐고, 지금은 다시 우지(Beef Tallow)·폐식용유 기반 바이오 윤활유가 일부 부상하고 있습니다. 13편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식용 기름: 라드, 대두유, 팜유, 카놀라유가 나눠 담았습니다.

 

화장품 원료: 용연향 대신 합성 향료가, 경뇌유 대신 식물성 왁스와 오일이 쓰입니다. 15편에서 읽은 동백기름, 피마자기름이 이 계보에 있습니다.

 

한 마리의 고래가 담당하던 역할을 지금은 수십 가지 원료가 나눠 맡고 있습니다. 그 분업의 지도를 읽어온 것이 이 시리즈였습니다.


◼ 21세기 포경 — 기름이 아닌 다른 이유로

고래기름 경제가 사라진 지금도 포경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습니다.

[현대의 쟁점] 기름을 넘어 고기를 위해: 포경을 둘러싼 끝나지 않은 문화와 산업 논쟁

 

국제포경위원회(IWC)는 1986년 상업 포경 모라토리엄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노르웨이, 아이슬란드는 과학 조사 또는 예외 규정을 근거로 지금도 포경을 합니다.

 

현대 포경의 목적은 기름이 아닙니다. 고래 고기입니다. 일본에서 고래 고기는 전통 식문화로 보호받습니다. 그러나 실제 일본 국내 고래 고기 소비량은 과거보다 크게 줄었고, 포경을 지속하는 것이 문화 보존인지 산업적 이익인지에 대한 논쟁이 계속됩니다.

 

기름을 위해 쫓던 고래를, 이제는 고기를 위해 쫓는 세계. 기름의 문명이 바뀐 것처럼, 고래를 대하는 방식도 계속 변하고 있습니다.


◼ 이 시리즈가 읽어온 것 — 기름 한 병의 세계

16편에 걸쳐 읽어온 것을 세 문장으로 정리하겠습니다.

[지정학의 식탁] 올리브유 가격이 왜 서울 마트에서 오를까? 기름 한 병 뒤에 숨은 공급망

 

첫째, 어떤 기름도 완전한 해답이 아닙니다. 고래기름이 최고였다가 사라졌고, 라드가 건강한 기름이었다가 밀려났고, 크리스코가 더 건강하다가 트랜스지방으로 지탄받았고, 코코넛오일이 슈퍼푸드로 올랐다가 AHA 경고를 받았습니다. 기름에 대한 판단은 시대와 과학의 수준에 따라 바뀌어 왔습니다.

 

둘째, 기름 한 병 뒤에는 공급망이 있고, 공급망 뒤에는 지정학이 있습니다. 스페인에 가뭄이 들면 서울 마트 올리브유 가격이 오르고, 우크라이나에 전쟁이 나면 한국 식용유 매대가 빕니다. 팜유 농장이 열대우림을 밀어내고, 고래가 기름을 위해 사냥당했습니다. 기름은 밥상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환경·정치·경제의 문제였습니다.

 

셋째, 기름의 역사는 지속가능성이라는 질문으로 끝납니다. 고래기름이 사라지면서 석유가 왔고, 석유의 탄소 문제가 커지면서 바이오 연료가 옵니다. 팜유 대신 더 지속가능한 기름을 찾고, 동물성 지방을 항공 연료로 쓰는 방법을 연구합니다. 인류는 계속 더 좋은 기름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그 여정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 오십보의 마무리

다음에 마트에서 기름 코너 앞에 서실 때, 한번 멈춰서 생각해보시길 권합니다.

[기름의 역사, 그 마지막 질문] 인류는 계속 더 지속가능한 기름을 찾아 헤매고 있다

 

저 기름은 어디서 왔을까. 누가 재배했고, 어떤 땅에서 자랐고, 어떤 공급망을 타고 여기까지 왔을까. 그 기름의 역사는 얼마나 됐고, 앞으로 얼마나 쓰일까.

 

기름 한 병을 읽는 것이, 세계를 읽는 것이라는 것을 이 시리즈에서 함께 확인하셨기를 바랍니다.

 

참기름 한 방울에서 시작해, 고래기름으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지구가 있었습니다.

 

오늘도 한 걸음, 오십보.


식용유의 경제학 시리즈 전편 목록


[이안박 — 단어의 서재]

언어가 위계를 만드는 방법, 같은 한자가 다른 세계를 뜻한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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