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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보의 일상다반사

[일상다반사] 250년 전에 이미 글을 쓰는 기계가 있었다, 오토마타

by 오십보 백보 2026.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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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250년 전에 이미 글을 쓰는 기계가 있었다, 오토마타

 

안녕하세요, 오십보입니다.

어제 유튜브 알고리즘이 이상한 걸 보여줬어요.

1774년 자케 드로의 세 오토마타

 

작은 소년 인형이 책상 앞에 앉아 하얀 종이 위에 또박또박 글씨를 쓰는 영상이었는데, 처음엔 "어, 귀여운 앤티크 장난감이네" 하고 스크롤 내리려다 멈췄습니다. 손가락이 움직이는 게 너무 자연스러운 거예요. 손목이 꺾이고, 펜 끝이 종이에 닿고, 심지어 눈이 쓰고 있는 글자를 따라가더라고요.

 

1770년대에 만들어진 기계였습니다.

 

궁금하신 분은 아래 영상에서 직접 확인해보세요. → 250년 전 글 쓰는 기계 — 자케 드로 오토마타 (YouTube)

 


◼ 피에르 자케 드로, 시계 팔려다 인류의 미래를 만든 사람

1721년 스위스 라쇼드퐁(La Chaux-de-Fonds)에서 태어난 **피에르 자케 드로(Pierre Jaquet-Droz)**는 원래 시계 장인이었습니다. 당시 유럽 왕실과 귀족들에게 시계를 팔기 위해 뭔가 눈길을 끄는 게 필요했고, 그래서 만든 게 바로 오토마타(Automata), 즉 자동 인형입니다.

 

시계를 사러 온 고객들에게 "저 좀 봐주세요"라고 말하는, 살아있는 쇼룸이었던 거죠. 그런데 결과물이 너무 대단해서 시계보다 오토마타가 더 유명해졌습니다. 마케팅 도구로 시작했다가 역사를 만들어버린 경우예요.

 

1768년에 시작해서 1774년에 완성된 세 기계 인형 — 작가(The Writer), 화가(The Draughtsman), 음악가(The Musician). 지금 스위스 뇨샤텔(Neuchâtel) 미술사 박물관에 250년이 지난 오늘도 살아서 작동하고 있습니다.


◼ 세 인형이 각자 맡은 일

이 셋을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작가는 "기록"의 기계고, 화가는 "이미지"의 기계이며, 음악가는 "퍼포먼스"의 기계입니다. 각각 문자 창작, 시각적 창작, 청각적 창작을 담당해서 인간이 하는 예술 행위 세 가지를 18세기 기술로 통째로 구현한 것입니다.

 

왜 하필 이 세 가지였을까요? 당시 귀족 교육의 세 기둥이 글쓰기, 그림, 음악이었거든요. 자케 드로가 타깃 고객을 정확히 파고든 겁니다.


◼ 6,000개 부품으로 글씨를 쓰는 소년

세 인형 중 가장 복잡한 건 작가입니다.

작가 오토마타 내부 구조 – 6,000개 부품

 

작은 소년 모양의 이 인형 안에는 약 6,000개의 부품이 들어 있어요. 태엽, 기어, 그리고 핵심인 캠(cam) 구조가 빽빽하게 채워져 있습니다.

캠 메커니즘 원리 – 전기 없는 프로그래밍  –

 

캠은 불규칙한 곡선 형태의 금속 원판입니다. 이 원판이 회전하면서 연결된 부품을 밀었다 당겼다 하는데, 그 곡선의 모양에 따라 동작의 경로가 결정됩니다. 캠의 굴곡이 동작을 기억하는 장치인 거예요. 오늘날 프로그램 코드가 컴퓨터에게 "이렇게 움직여라"고 지시하는 것처럼, 캠은 금속 인형에게 손목의 각도, 손가락의 압력, 펜을 종이에서 떼는 타이밍을 알려줍니다.

 

작가 오토마타 안에는 이 캠이 120개 들어 있습니다. 120개의 캠이 순서대로 작동하면서 손의 모든 동작을 제어해요. 진짜 깃털 펜으로, 진짜 잉크를 찍어서, 진짜 종이에 글씨를 씁니다. 잉크가 떨어지면 펜을 잉크병에 담갔다 꺼내는 동작도 포함해서요.

 

더 놀라운 건 이 인형이 프로그래밍이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내부의 문자 선택 디스크를 바꾸면 최대 40자, 4줄 분량의 원하는 문장을 설정할 수 있어요. 지금 이 인형한테 당신 이름을 써달라고 설정하면, 써줄 수 있다는 뜻이에요. 250년 전에 만든 기계가요.

 

일부 컴퓨터 역사가들이 이 작가 오토마타를 **"최초의 프로그래밍 가능한 기계"**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CPU도 없고, 전기도 없고, 코드도 없던 시절에 태엽과 캠만으로 프로그래밍 가능한 출력 장치를 만든 거니까요.


◼ 나비가 이끄는 마차를 그리는 소년

화가(The Draughtsman)는 작가보다 조금 어린 소년 모습입니다.

 

이 인형 안에는 36개의 캠이 들어 있어요. 손을 X·Y 두 방향으로 움직이고, 세 번째 방향은 연필을 종이에서 들었다 놓는 동작을 담당합니다. 이 세 방향의 조합으로 실제로 네 가지 그림을 그릴 수 있어요. 나비가 이끄는 마차에 탄 큐피드, 강아지 초상화, 프랑스 왕과 왕비의 얼굴, 풍경화.

 

눈이 손을 따라가며 자기가 그리는 그림을 바라보는 동작도 구현되어 있습니다. 연필에서 나오는 흑연 가루를 가끔 입으로 후 불어내기도 한다고 해요.

 

화가는 캠 수가 36개로 작가(120개)보다 적지만, 2차원 공간에서 자유로운 선을 그린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 복잡한 기계적 계산이 필요했습니다. 글씨는 경로가 정해진 반면, 그림은 좌표를 자유롭게 움직여야 하니까요.


◼ 피아노 앞에 앉은 소녀, 그리고 인사

음악가(The Musician)는 셋 중 유일하게 여성 모습입니다.

 

실제 작동하는 오르간 건반 앞에 앉아 손가락으로 건반을 누르고, 연주하는 동안 가슴이 실제로 오르내리며 숨을 쉬는 것처럼 보입니다. 팔, 손가락, 몸의 흔들림까지 기계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그리고 음악이 끝나면 허리를 살짝 굽혀 인사합니다.

 

이 인형의 자율 작동 시간이 약 1시간이라고 하는데,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정밀도입니다.


◼ 마녀로 오해받은 기계들

자케 드로가 이 인형들을 유럽 각지에 들고 다니며 시연했을 때, 반응이 늘 경이로움만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진심으로 무서워했고, 스페인에서는 종교 당국이 이 인형들을 압수해 조사했다는 기록도 있어요. 당시 기준에서는 인간처럼 움직이는 기계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요. "이게 영혼이 있는 건가, 아니면 악마가 깃든 건가."

 

생각해보면 이상한 반응이 아닙니다. 우리도 ChatGPT가 처음 나왔을 때, AI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그 묘한 불쾌감의 경계선에서 비슷한 질문을 했잖아요. "저게 진짜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흉내 내는 걸까."

 

250년 전 태엽 기계 앞에서 느낀 감각과, 지금 AI 앞에서 느끼는 감각이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는 게 자꾸 마음에 걸립니다.


◼ 캠이 기억하고, 기어가 전달하고, 손가락이 쓴다

영상을 보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내부 구조를 분해해서 보여주는 부분이었어요.

 

전자 부품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배터리도 없고, 회로도 없고, 센서도 없어요. 오직 캠, 기어, 레버, 축, 연결봉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결과물이 사람이 손으로 직접 쓴 것 같은 글씨입니다.

 

캠의 굴곡이 동작의 경로를 기억하고, 기어가 그 신호를 증폭해서 전달하고, 연결봉이 손가락 끝까지 그 힘을 보냅니다. 이 흐름이 1초에 수백 번 반복되면서 글씨 한 획이 완성됩니다. 전기 한 방울 없이.

1770년대와 2020년대 AI – 본질적으로 같은 질문

 

이걸 보고 나서 "기술이 발전했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지금 우리가 쓰는 기술이 더 빠르고 더 복잡한 건 맞지만, 250년 전 사람들도 당시 가진 도구로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 —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 — 을 진지하게 다루고 있었던 거잖아요.


◼ 그래서 결론은

뇨샤텔 박물관에 가면 지금도 살아서 작동하는 세 소년·소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여행 버킷리스트에 하나 추가했어요. 언젠가 직접 가서 그 소년이 쓴 글씨를 옆에서 보고 싶습니다.

 

작가 오토마타가 무슨 문장을 쓰도록 설정되어 있는지 아세요?

250년 된 태엽 기계가 쓴 데카르트 문장

 

"Je pense donc je suis." —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그 문장을요.

 

250년 된 태엽 기계가 쓰는 문장치고는, 너무 잘 어울리지 않나요.

 

영상이 궁금하신 분은 여기서 확인해보세요. → 250년 전 글 쓰는 기계 — 자케 드로 오토마타 (YouTube)

오늘도 한 걸음, 오십보.


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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