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긋는 사람들

[선을 긋는 사람들 13편 · 유럽 C편] 유럽의 역설 — 선을 지우는 데 성공한 대륙이 왜 다시 국경을 닫고 있는가

오십보 백보 2026. 8. 8.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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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긋는 사람들 13편 · 유럽 C편] 유럽의 역설 — 선을 지우는 데 성공한 대륙이 왜 다시 국경을 닫고 있는가


여러분, "선을 긋는 사람들" 열세 번째 이야기이자 유럽 3부작의 마지막 편입니다. 11편의 첫 장면을 기억하실 겁니다. 암스테르담에서 기차를 탄 여행자가 여권 한 번 꺼내지 않고 파리에 도착하는 장면입니다. 그때 우리는 "이 평온함이 얼마나 최근의 일인가"를 물었습니다. 이제 거꾸로 물을 차례입니다. 이 평온함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오늘의 장면 — 석탄과 철강에서 시작된 발상

두 나라가 싸우려면 철강이 필요하고, 철강을 만들려면 석탄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석탄과 철강을 같이 관리하면 싸울 수 없지 않을까요. 1950년, 이 단순한 논리가 역사를 바꿉니다.

 


선은 어떻게 지워졌나

1950년 5월 9일, 슈만 선언

통합의 시작, 평온한 대륙의 탄생

프랑스 외무장관 로베르 슈만이 이 제안을 발표했습니다. 실제 설계자는 프랑스 관료 장 모네였지만, 선언은 슈만의 이름으로 나왔습니다. 핵심은 "프랑스-독일 간 석탄과 철강 생산 전체를 공동의 최고 기관 아래 놓겠다"는 것이었고, 이 생산의 결속이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을 "생각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물질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라고 선언은 밝혔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불과 5년 만에, 프랑스가 독일에 먼저 손을 내민 셈입니다. 이후 5월 9일은 '유럽의 날'로 기념됩니다.

 

단계별 통합의 역사

  • 1951년 파리조약으로 합의되고 1952년 7월 23일 발효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서독·프랑스·이탈리아·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6개국으로 시작했습니다.
  • 1957년 로마조약, 1958년 1월 1일 발효된 유럽경제공동체(EEC)와 유라톰. 다만 역내 관세가 실제로 완전히 철폐된 것은 1968년 관세동맹 완성 이후입니다.
  • 1965년 서명, 1967년 7월 1일 발효된 병합조약으로 ECSC·EEC·유라톰의 집행기관과 이사회가 하나로 통합됩니다. 세 공동체가 법적으로 완전히 단일화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때부터 통칭 '유럽공동체(EC)'로 불리게 됩니다.
  • 1985년 6월 14일 룩셈부르크의 작은 마을 솅겐에서 프랑스·독일·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5개국이 솅겐 협정에 서명합니다.
  • 1993년 11월 1일 마스트리흐트 조약 발효로 유럽연합(EU)이 출범해 정치 통합과 공동 시민권이 도입됩니다.
  • 1995년 3월 26일 솅겐 협정이 7개국에서 실제 발효됐고, 2025년 1월 불가리아와 루마니아가 육상 국경까지 완전 가입하며 지금은 29개국, 4억 명 이상이 국경 없이 이동합니다.
  • 2002년 1월 유로화가 12개국에서 통용되기 시작해, 2025년 기준 20개국이 되었습니다.
  • 2009년 12월 1일 리스본 조약 발효로 EU는 명시적 법인격을 갖게 됩니다.

회원국 수는 1952년 6개국에서 2007년 27개국, 2013년 크로아티아 가입으로 28개국이 됐다가 2020년 영국 탈퇴로 다시 27개국이 됐습니다. 1952년 이후 EU 가입국 사이에 전쟁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2012년 노벨위원회는 "60년 이상 유럽의 평화와 화해, 민주주의와 인권 발전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EU에 노벨평화상을 수여했습니다.

선을 지우는 거대한 흐름 — 솅겐과 유로


현지인은 어디에 있었나

슈만, 장 모네, 서독 총리 아데나워, 이탈리아 총리 데 가스페리는 모두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은 세대였습니다. 이들의 동기는 이상주의가 아니라 "또 전쟁이 나면 유럽은 끝난다"는 현실적인 공포였습니다.

 

물론 모두 같은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대통령 드골은 1963년과 1967년 두 차례에 걸쳐 영국의 EEC 가입에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드골에게 통합은 주권을 넘기는 일이 아니라 프랑스가 주도하는 강한 유럽이어야 했습니다. 1963년 1월 22일 드골과 아데나워는 엘리제 조약을 맺어 프랑스와 서독의 우호 협력을 공식화했습니다. 이 조약이 화해를 제도화한 핵심 문서였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이것이 진짜 종전 협정"이라는 말은 전언으로 전해질 뿐 원문으로 확인되지는 않습니다.


선이 만든 결과 — 성공의 역설

EU 단일시장은 4억 5천만 명과 2,600만 개 기업이 활동하는 세계 최대 경제권 중 하나입니다. 역내 상품교역 규모는 연간 4조 유로를 넘는 수준으로 설명되며, 한 연구는 솅겐 내부 국경 통제 제거가 국경당 약 0.7%포인트의 비용 절감 효과를 낸다고 추정합니다.

그러나 이 성공은 새로운 문제도 함께 낳았습니다.

 

브렉시트. 2016년 6월 23일 영국 국민투표에서 51.9%가 EU 탈퇴를 택했고, 영국 기준 2020년 1월 31일 밤 EU를 공식 떠났습니다. 그해 영국 GDP는 9.9% 감소했는데, 이는 주로 코로나19 팬데믹 충격의 결과이며 브렉시트 자체의 영향과는 구분해서 봐야 합니다. 영국 예산책임청은 브렉시트로 인해 장기적으로 영국의 수출입이 EU 잔류 시나리오보다 각각 약 15%, 생산성은 약 4% 낮아질 것으로 추정합니다.

[성공의 역설] 지워진 선을 되돌리다, 영국이 선택한 '브렉시트'

 

헝가리, 그리고 한때 폴란드. 헝가리 오르반 총리는 2014년 이후 '비자유 민주주의'를 표방하며 사법 독립과 언론 자유 등 법치주의 문제로 EU와 충돌해왔고, EU는 관련 기금 지급을 조건부로 묶는 방식으로 대응해왔습니다. 폴란드도 2015년 이후 비슷한 갈등을 겪었지만 2023년 말 정권 교체 이후 자금 동결 해제가 진행됐습니다. EU 조약은 회원국을 강제로 제명하는 절차를 두고 있지 않으며, 제7조를 통해 이사회 투표권 등 일부 권리를 정지할 수 있을 뿐입니다.

내부의 갈등 —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충돌

 

다시 서는 국경들. 코로나19 시기 다수 회원국이 내부 국경 통제를 재도입했는데, 이는 2015년 난민 위기 이후에도 여러 차례 있었던 일이지만 코로나19 때는 유례없이 광범위했습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EU는 우크라이나 피난민에게 임시 보호 자격을 부여했고, 이 조치는 2027년까지 연장된 상태입니다. 2024년 9월 독일은 남은 육상 국경(프랑스·룩셈부르크·네덜란드·벨기에·덴마크)에도 임시 국경통제를 도입해, 기존의 오스트리아·스위스·폴란드·체코 국경 통제와 합쳐 9개 육상 국경 전체에서 통제가 가능하게 됐습니다. 2025년 2월에는 이 조치를 6개월 추가 연장했습니다. 다만 이는 모든 사람을 상시 검문한다는 뜻이 아니라, 필요할 때 고정·이동식 검문을 실시할 수 있게 한 임시 조치입니다.

다시 서는 국경들 — 팬데믹과 전쟁의 그늘

 

솅겐은 폐지되지 않았습니다. 회원국은 공공질서나 안보에 중대한 위협이 있을 때 최후 수단으로 내부 국경 통제를 재도입할 수 있고, 지금도 29개국은 원칙적으로 국경 없는 이동권을 공유합니다. 문제는 이 '예외'가 난민 위기, 팬데믹, 전쟁, 이민 문제를 거치며 점점 더 자주, 더 길게 반복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선을 지운 제도가 가장 성공했기 때문에, 위기가 올 때마다 사람들은 다시 그 선을 찾습니다.

 

유럽 주권이라는 질문. 2024년 이후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은 소르본 연설 등을 통해 유럽이 안보·산업·기술에서 더 독립적인 전략을 가져야 한다고 거듭 주장해왔습니다. 트럼프 2기 출범 이후 미국의 유럽 안보 공약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유럽에서는 이를 미국이 한 발 물러서는 신호로 받아들이는 인식이 커졌습니다. 경제로는 선을 지웠지만, 안보는 여전히 각국의 몫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오늘의 질문

로베르 슈만은 "유럽은 한 번에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구체적인 성취를 통해 조금씩 만들어질 것"이라 말했습니다. 75년이 지난 지금, 그 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습니다. 유럽은 실제로 조금씩 만들어졌고, 가입국 사이의 전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구체적 성취는 동시에 새로운 균열도 함께 만들었습니다. 브렉시트는 지운 선이 되돌려질 수 있다는 것을, 헝가리는 규칙을 어겨도 퇴출되지 않는다는 것을, 독일의 국경통제는 위기 앞에서 협력보다 자국 우선이 먼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오늘날의 질문 — 평화는 지속 가능한가?

 

선을 지운 유럽은 더 평화로워졌는가. 그리고 그 평화는 지속 가능한가. 이 시리즈는 지금까지 선을 그은 사람들의 이야기였고, 11·12편에서는 유럽이 스스로를 나눈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번 편에서 처음으로 선을 지우려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이야기의 결말은 아직 쓰이지 않았습니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이 시리즈 전체의 질문으로 돌아가, 국경을 다시 그어 문제를 해결하려 한 나라들, 남수단과 동티모르로 향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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