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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긋는 사람들

[선을 긋는 사람들 4편] 르완다 — 신분증 한 장이 이웃을 갈라놓았을 때

by 오십보 백보 2026.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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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긋는 사람들 4편] 르완다 — 신분증 한 장이 이웃을 갈라놓았을 때

"선을 긋는 사람들" 네 번째 이야기입니다. 앞선 세 편에서 본 선은 모두 지도 위에 그어졌습니다. 이번 편의 선은 다릅니다. 지도가 아니라 사람의 몸과 신분증 위에 그어진 선입니다.


오늘의 장면 — 아프리카의 싱가포르

2025년 기준 르완다는 최근 수년간 연 5~8%대의 높은 경제 성장률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수도 키갈리는 아프리카에서 손꼽히게 깨끗한 도시입니다. 2008년부터 일회용 비닐봉지 사용을 전면 금지했고,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는 전 국민이 함께 거리를 청소하는 '우무간다(Umuganda)' 제도가 지금도 운영됩니다. 외신들은 르완다를 "아프리카의 싱가포르"라고 부릅니다.

신분증 한 장이 이웃을 갈라놓았을 때

그런데 이 나라는 불과 30여 년 전, 100일 동안 약 80만~100만 명이 이웃에게 학살당한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학살의 방아쇠를 당긴 것은 총이나 폭탄이 아니라 신분증 한 장이었습니다.


선은 어떻게 그어졌나 — 줄자와 족보로

이번 편의 선은 몸에 그어진 선입니다.

줄자와 족보로 그은 선 — 벨기에의 분류 시스템

1884년 베를린 회의(2편 참조)에서 독일은 르완다-부룬디 지역을 '독일령 동아프리카'로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하면서, 베르사유 조약과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체제에 따라 르완다-우룬디는 벨기에의 통치 아래 들어갑니다. 전쟁이 끝난 회의실에서 또 한 번 선이 그어진 것입니다.

 

벨기에가 르완다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본 것은 농사짓는 사람들과 소를 키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벨기에 식민 당국은 여기에 '함족 가설(Hamitic hypothesis)'이라는 인종 이론을 들이댔습니다. 아프리카의 더 '우월한' 집단은 아프리카 밖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이론이었습니다. 이 틀에 따라 벨기에 관리들은 사람들의 코 형태와 신체 특성, 소 떼의 규모와 생계 방식을 기준으로 '투치족'과 '후투족'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이 구분이 애초에 고정된 사실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현지인은 어디에 있었나 — 원래는 하나였던 사람들

벨기에가 오기 전, 르완다의 투치와 후투는 언어도 문화도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둘 다 키냐르완다어를 썼고, 같은 왕 밑에서 살았습니다. '투치'와 '후투'는 애초에 고정된 민족 개념이라기보다 생계 방식에 가까운 사회적 구분이었고, 소를 많이 갖게 되면 후투에서 투치로 신분이 이동하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유동적인 사회 계층이었지, 피가 다른 민족이 아니었습니다.

원래는 하나였던 사람들 — 벨기에 전의 르완다

벨기에는 1930년대 초, 르완다 전체 국민을 조사해 종족이 명기된 신분증을 도입했습니다. 한 번 찍힌 도장은 바꿀 수 없었습니다.

 

투치족 엘리트는 행정 협력자로 우대받았고, 후투족은 하층 노동계층으로 굳어졌습니다. 60년 가까이 이 신분증 한 장이 누가 학교에 다닐 수 있는지, 누가 관리가 될 수 있는지를 갈랐습니다.


선이 만든 결과 — 100일, 그리고 세계의 침묵

1962년 르완다는 독립합니다. 그런데 독립 직전 벨기에는 이번엔 후투족 쪽으로 지지를 옮겼습니다. 수십 년간 투치족을 우대하다가 방향을 바꾼 것입니다. 후투족 정부가 들어섰고, 많은 투치족이 박해를 피해 우간다 등 주변국으로 피신했습니다.

100일, 그리고 세계의 침묵

1994년 4월 6일 밤, 하비야리마나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키갈리 공항 상공에서 격추됩니다. 누가 격추했는지는 지금도 논란이 있지만, 이 사건은 이미 준비되어 있던 학살의 신호탄이 됐습니다. 라디오 방송국 RTLM은 투치족을 '바퀴벌레(Inyenzi)'라 부르며 이웃을 죽이라고 선동했습니다. 학살에 주로 쓰인 도구는 총이 아니라 마체테, 날이 넓은 농기구였습니다.

 

100일 동안 약 80만에서 1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대사에서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집중적으로 이뤄진 학살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학살 전후로 약 200만 명에 이르는 르완다인이 주변국으로 탈출했습니다.

 

세계는 방관했습니다. '제노사이드(genocide)'라는 단어를 쓰면 국제법상 개입 의무가 생기기 때문에, 미국 국무부는 공식 브리핑에서 '제노사이드 행위(acts of genocide)'라는 표현을 골라 썼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단어 선택 하나로 책임을 피해간 셈입니다. 이후 국제형사재판소(ICTR)가 학살 책임자들을 기소하고 재판했습니다.


오늘의 질문 — 그 선은 지금도 살아있는가

오늘의 르완다는 법적으로 투치족과 후투족의 구분을 폐지했습니다. 신분증에서 종족란이 사라졌고, 헌법으로 종족주의를 금지했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같은 마을에서 살아가며 전통 재판 방식을 근대적으로 응용한 '가차차(Gacaca)' 법정이 수십만 건의 사건을 처리했습니다. "아프리카의 싱가포르"라는 별명은 절망을 딛고 선택한 방향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다만 이 고속 성장과 청결한 도시 이미지 이면에는, 언론 자유와 정치적 통제를 둘러싼 국제사회의 논쟁도 함께 존재합니다.

그 선은 지금도 살아있는가 — 르완다의 선택

 

벨기에는 1994년 이후 르완다에 공식 사과했고, 프랑스는 2021년에야 학살에 대한 책임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줄자로 코를 재고 신분증을 설계하던 식민 관료들은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민족이라고 부르는 것들 중 일부는, 누군가가 줄자를 들고 사람을 재던 어느 오후에 만들어졌습니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다시 지도 위의 선으로 돌아가, 두 외교관이 5주 만에 중동을 나눈 사이크스-피코 협정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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