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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의 식탁

[밀의 경제학 5편] 강력분·중력분·박력분 — 단백질 함량 하나가 빵과 라면과 케이크를 가른다

by 오십보 백보 2026.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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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의 경제학 5편] 강력분·중력분·박력분 — 단백질 함량 하나가 빵과 라면과 케이크를 가른다


밀가루는 다 같은 밀가루가 아닙니다

마트 제과 코너에 가면 밀가루 봉투 세 종류가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강력분, 중력분, 박력분. 가격 차이는 크지 않지만, 잘못 고르면 빵이 떡이 되거나 케이크가 질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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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 가지를 가르는 기준은 딱 하나입니다. 단백질 함량입니다. 정확히는 단백질이 물과 만나 형성하는 **글루텐(Gluten)**의 양입니다. 글루텐은 반죽에 탄성과 점성을 주는 성분으로, 많을수록 쫄깃하고 탄탄한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케이크처럼 부드럽고 가벼운 결을 원한다면 글루텐이 적어야 하고, 빵이나 라면처럼 씹히는 힘이 필요하다면 글루텐이 많아야 합니다.


세 가지 밀가루, 단백질로 갈립니다

밀가루 종류별 단백질 함량 비교

**강력분(Strong Flour)**은 단백질 함량이 13% 이상입니다. 글루텐 함량이 높아 탄력 있는 반죽이 만들어지고, 이산화탄소를 붙잡아 부풀어 오르는 구조를 만듭니다. 식빵, 바게트, 피자도, 파스타에 사용합니다. 경질밀(Hard wheat)에서 주로 얻어집니다.

빵 반죽 글루텐 구조 클로즈업 (탄력 있는 반죽)

 

**중력분(All-purpose Flour)**은 단백질 함량이 **8.5~10.5%**입니다. 강력분과 박력분의 중간 성질로, 국수·수제비·부침개·라면에 적합합니다. 한국과 호주산 밀에서 주로 얻어집니다. 한국 가정에서 '그냥 밀가루'라고 부르는 것이 대부분 중력분입니다.

 

**박력분(Weak Flour)**은 단백질 함량이 **6~9%**로 가장 낮습니다. 글루텐이 적어 가볍고 바삭한 식감을 냅니다. 케이크, 카스테라, 쿠키, 튀김옷에 사용합니다. 연질밀(Soft wheat)에서 얻어집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강력분은 구조를 만들고, 박력분은 결을 만들며, 중력분은 그 사이 어딘가에서 일상을 버팁니다.


한국 라면은 어떤 밀가루를 씁니까

한국 라면 산업이 사용하는 밀가루는 주로 중력분과 준강력분 계열입니다. 라면 면발의 특성상 강력분처럼 지나치게 탄력이 강하면 조리 후 식감이 딱딱해지고, 박력분처럼 너무 약하면 퍼집니다. 중력분에서 준강력분 사이의 단백질 함량이 라면 면발의 '꼬들꼬들한 쫄깃함'을 만드는 데 적합합니다.

라면 면발 쫄깃한 식감 (중력분/준강력분 결과물)

 

원료 수입 경로는 더 구체적입니다. 국내 식품업체들은 미국산 밀과 호주산 밀을 혼합해 면을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농심 신라면과 삼양식품 불닭볶음면 모두 미국산·호주산 수입 밀을 사용하며, 농심은 대한제분, CJ제일제당, 사조동아원, 삼양밀맥스 등 6개 업체로부터 밀가루를 납품받고 있습니다.

 

대한제분은 면 전용 고급 제품 라인업으로 '곰표고급생면용', '곰표강력제면용', '곰표고급제면용' 등을 별도로 운영하며, 면발의 부드러움과 쫄깃함을 세분화해 공급합니다. 라면 회사 입장에서는 밀가루의 단백질 함량과 글루텐 특성이 제품 맛을 결정하는 핵심 원료 변수입니다. **시장의 식탁 | 밀의 경제학 1편 — 밀가루 한 포대가 라면값을 올리는 법**에서 다뤘듯, 국제 밀 가격이 오르면 라면값이 오르는 구조가 여기서 시작됩니다.


우리밀의 약점 — 제빵에서 왜 불리한가

**시장의 식탁 | 밀의 경제학 4편 — 한국은 왜 밀을 못 키울까**에서 다뤘듯, 우리밀의 자급률은 2%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단순히 생산량이 적은 것 외에, 품질 측면에서도 제약이 있습니다.

 

국내 토종 밀은 수입 밀에 비해 단백질 함량이 상대적으로 낮습니다. 제빵용 강력분은 단백질 13% 이상이 필요한데, 국내 일반 품종의 우리밀은 이 기준을 안정적으로 맞추기가 어렵습니다. 글루텐이 부족하면 반죽이 이산화탄소를 잘 붙잡지 못해, 빵이 제대로 부풀지 않습니다. 수분 흡수율도 수입 밀과 다르고, 제분율도 낮아 같은 원맥 양으로 만들어지는 밀가루 양도 적습니다.

 

우리밀로 빵을 만들면 '맛은 있는데 식감이 무겁거나 덜 부풀었다'는 반응이 나오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밀이 잘 맞는 분야는 어디인가

약점이 있다고 해서 모든 분야에서 불리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밀의 특성이 경쟁력이 되는 분야가 있습니다.

 

국수와 칼국수는 중력분 계열의 우리밀이 가장 잘 맞습니다. 과도한 글루텐이 없어도 되는 이 분야에서 우리밀은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면발을 만들어냅니다. 수제비, 부침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밀 국수·칼국수 전통 면발

 

전통 발효 식품과의 연계도 강점입니다. 우리밀 누룩을 활용한 막걸리와 전통주 분야에서 국산 밀은 수입 밀과 차별화된 발효 특성을 냅니다. 쫀쿠의 **이야기 팬트리 | 빵, 떡, 그리고 누룩의 시간**에서 다룬 것처럼, 한국의 누룩 문화는 수입 밀보다 국산 밀과 더 깊이 연결됩니다.

 

통밀 빵과 건강빵 시장도 가능성 있는 영역입니다. 글루텐 함량이 낮더라도 통밀 특유의 풍미와 영양 밀도에서 차별점을 만들 수 있습니다. 자연드림에서 판매하는 우리밀 리얼 발효빵이 이 시장의 사례입니다.


제빵 핸디캡을 넘는 대안들

제빵 분야에서 우리밀의 단백질 부족 문제를 극복하려는 시도들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방향은 품종 개량입니다. 농촌진흥청은 글루텐 함량이 높은 제빵 전용 품종 개발에 나서고 있습니다. 그 성과물 중 하나가 백강밀황금알입니다. 두 품종 모두 글루텐 함량이 높아 제빵성이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 정부 보급종입니다.

 

두 번째는 수직계열화입니다. 대전의 대표 제빵 브랜드 성심당이 주목할 만한 사례입니다. 성심당은 2024년 10월 대전 유성구 교촌동 자사 소유 부지 약 **7,000평(2만3,140㎡)**에 제빵용 국산 밀 품종 황금알과 백강밀을 파종했습니다. 농촌진흥청·대전시 농업기술센터와 협력해 기술 지원을 받았고, 2025년 6월 12일 첫 수확을 완료했습니다. 수확한 밀은 제분 단계를 거쳐 대전시와 함께 대전밀 빵 브랜드로 개발할 계획입니다. 빵 회사가 직접 밀밭을 가꾸고 수확해 빵으로 만드는 완전한 수직계열화입니다.

성심당의 시작이 1956년 미국 원조 밀가루 두 포대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69년 만에 자신의 밀밭을 일군 이 장면은 단순한 마케팅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성심당 교촌동 밀밭 – 황금알·백강밀 수확 장면

 

세 번째는 블렌딩 전략입니다. 우리밀 단독으로 강력분 기준을 맞추기 어렵다면, 수입 강력분과 국산 밀을 일정 비율로 혼합해 쓰는 방법입니다. 농식품부도 최근 국산 밀 정책 방향을 '생산량 확대'에서 **'품질·수요 중심'**으로 전환하면서, 블렌딩·차등매입 제도 도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어떻게 했나 — 비교를 위한 참고점

일본도 전후 미국 원조 밀로 밀 의존 구조가 형성됐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이후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수입 밀 전량을 정부 주도 국영무역 형태로 들여와 가격과 품질을 직접 관리했고, 국산 밀 품종 개발과 지역 브랜드 밀 육성을 병행했습니다. 홋카이도산 하루요코이, 기타호나미 등 지역 특산 밀 브랜드가 고급 제빵 시장에서 프리미엄을 형성했습니다.

 

같은 전후 밀 원조 구조에서 출발했지만, 정책 선택의 차이가 수십 년 후 자급률과 산업 구조의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이안 박의 **브랜드 아카이브 | 황국균은 어떻게 일본의 국균이 되었는가**에서 다뤘듯, 일본은 발효 원료 작물을 문화와 산업으로 연결하는 데 국가 전략 수준의 일관성을 보여왔습니다.


오십보의 정리

단백질 함량 하나가 빵과 라면과 케이크를 가릅니다. 그리고 그 단백질 함량을 어느 나라 밀에서 얻느냐가 한국 식탁의 가격과 식량 안보를 결정합니다.

우리밀 vs 수입밀 특성 비교 인포그래픽

 

우리밀은 국수와 전통 발효 식품에 강점이 있고, 제빵에는 구조적 핸디캡이 있습니다. 그 핸디캡을 품종 개량, 수직계열화, 블렌딩으로 좁혀가는 시도가 지금 현재 진행 중입니다. 1956년 원조 밀가루 두 포대로 시작한 성심당이 69년 만에 자신의 밀밭을 일군 것은, 그 긴 여정의 하나가 마침내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자급률 2%가 5%가 되려면 품종만이 아니라 공급망 전체가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다음 글 예고

[시장의 식탁 | 밀의 경제학 6편] 밀값이 내려가도 라면값이 안 내려가는 이유 — 원가 하락이 소비자 가격으로 이어지지 않는 구조


함께 읽으면 좋은 글

한국이 왜 밀을 거의 키우지 못하게 됐는지 구조적 배경은 → **[시장의 식탁 | 밀의 경제학 4편] 한국은 왜 밀을 못 키울까**를 읽어보세요.

시카고 선물시장이 한국 라면값을 결정하는 원리는 → **[시장의 식탁 | 밀의 경제학 1편] 밀가루 한 포대가 라면값을 올리는 법**을 참고하세요.

발효 원료 작물과 국가 산업 전략의 연관성은 → 이안 박의 **브랜드 아카이브 | 황국균은 어떻게 일본의 국균이 되었는가**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밀가루와 누룩이 만나는 전통 발효 문화의 맥락은 → 쫀쿠의 **이야기 팬트리 | 빵, 떡, 그리고 누룩의 시간**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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