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의 경제학 3편] 막힌 항구, 열린 육로, 그리고 흔들리는 연대 — 우크라이나 밀은 지금 어떤 길로 오는가
안녕하세요, 오십보입니다.
지난 2편에서 체르노젬 흑토가 왜 우크라이나를 세계의 빵 바구니로 만들었는지, 그리고 2022년 흑해가 막히면서 세계 식량 시장이 어떻게 흔들렸는지 함께 읽었습니다.
→ [밀의 경제학 2편] 우크라이나는 왜 세계의 빵 바구니인가
그런데 2편을 발행하고 나서 독자분이 댓글로 이런 질문을 남겨주셨습니다.
"2023년 7월에 곡물협정이 종료되었으면 지금은 우크라이나 밀은 어떻게 수출될까요?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으로 러시아 흑해 함대가 철수해서 흑해가 열렸을까요? 밀이 시끄럽지 않을 걸 보면 뚫려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오십보도 글을 쓰면서 궁금해서 찾아봤습니다. 일단 러시아의 초기 침공을 제외하곤 25년도와 26년도에 약 1,500만 톤의 밀이 오데사항을 통해 EU(불가리아 등) 주요 국으로 수출되고 있다고 합니다. 러시아는 이를 방임하지 않고, 필요시 협상 지렛대에 올려두고 공격과 통제 등으로 제한된 항해를 추진하고 있다고 하네요.
오늘 3편은 그 질문 하나를 끝까지 따라가 보겠습니다. 흑해 협정 이후, 우크라이나 밀은 실제로 어떤 길로 세상에 나오고 있는가.
협정이 끝난 뒤 — 막혔을까, 달라졌을까
2편에서 흑해 곡물 협정(BSGI)이 2023년 7월 러시아의 일방적 거부로 종료됐다고 위키피디아 자료를 인용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막히지 않았습니다. 달라졌습니다.
우크라이나는 협정 종료 이후 세 가지 경로를 동시에 가동하며 수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하나씩 들여다보겠습니다.

첫 번째 경로 — 흑해 해상로, 스스로 뚫은 길
협정이 깨진 뒤에도 우크라이나는 흑해 항구 운항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전략을 바꿨습니다. 외교 협정으로 안전을 보장받는 대신, 군사적 억지력으로 통로를 유지하는 방식입니다.

우크라이나 해군은 수상 드론과 미사일로 흑해에서 러시아 함정에 반격했고, 2023년 하반기부터 러시아의 제해권이 눈에 띄게 약화됐습니다. 오데사, 체르노모르스크, 피우데니 항구가 다시 운항을 시작했고, 우크라이나는 스스로 "임시 인도주의 항로"를 선포하며 화물선 운항을 재개했습니다.
USDA 집계에 따르면 2023년에서 2024년 사이 우크라이나의 해상 수출 비중은 전체의 80%에서 92%로 오히려 올라갔습니다. 전쟁 전 수준에 거의 근접한 수치입니다. 현재 이 해상 통로를 통해 이동한 화물은 누계 1억 톤 이상의 곡물을 포함합니다.
다만 리스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러시아는 드론과 미사일로 오데사 항구 인근 곡물 창고와 부두 시설을 반복적으로 공격합니다. 선박 보험료는 전쟁 전보다 크게 높아진 상태이고, 항로를 따라 이동하는 화물선은 매 항해마다 위험을 계산합니다. 뚫려 있지만, 안전하지는 않은 길입니다.
두 번째 경로 — EU 연대 통로, 연대라는 이름의 마찰
흑해 항로가 막혔던 2022년 5월, 유럽연합이 긴급 대안으로 만든 것이 **연대 통로(Solidarity Lanes)**입니다. 우크라이나 서쪽 국경을 넘어 폴란드·루마니아·헝가리·슬로바키아·몰도바를 통과하는 도로·철도·하천 복합 네트워크입니다.

EU 집행위원회의 2026년 3월 기준 집계에 따르면, 연대 통로를 통해 수출된 우크라이나 농산물은 누계 약 2억 1,700만 톤에 달합니다. 흑해 항로가 막혔던 2022~2023년 사이에는 전체 수출의 약 20% 이상을 이 통로가 담당했고, 해상로가 복구된 이후에는 약 15~20% 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다뉴브강 수로입니다. 우크라이나 남서쪽 국경에 위치한 이즈마일과 렌 항구에서 다뉴브강을 따라 루마니아 방향으로 흘러내려 가, 루마니아 흑해 항구인 콘스탄차에서 대형 선박으로 환적하는 경로입니다. 전쟁 전 연간 60만 톤 수준이었던 이 통로의 수출량은 전쟁 이후 수백만 톤 규모로 크게 늘었고, 2023년 피크 시기에는 연간 최대 1,400만 톤을 처리했습니다.

그런데 이 "연대"의 이름에는 뒤가 있습니다.
연대가 균열됐을 때 — 폴란드 농민들이 철로에 곡물을 쏟아부은 이유
2023년 봄, 폴란드 농민들이 우크라이나산 곡물을 실은 열차가 지나는 철로 위에 곡물을 쏟아부었습니다. 헝가리, 슬로바키아 농민들도 국경 도로를 막았습니다. 전쟁 이전까지 우크라이나의 든든한 지지자였던 이 나라들이 왜 이런 시위를 벌였을까요.

구조를 보면 이해가 됩니다.
연대 통로는 원래 우크라이나 곡물이 유럽을 **통과(transit)**해서 중동·아프리카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통과 과정에서 일부 물량이 폴란드·루마니아 등 인접국 시장에 그대로 머물기 시작했습니다. 이 나라들의 도매 가격보다 저렴한 우크라이나산 밀과 옥수수가 흘러들어오면서 지역 농민들의 수입이 줄어들었습니다. 연대를 위해 길을 열어줬더니, 그 길이 자국 농업을 압박하는 통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폴란드와 헝가리는 2023년 4월 일시적으로 우크라이나 농산물의 자국 내 판매를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고, EU 집행위원회는 이를 문제 삼았습니다.
같은 편인데, 이해관계가 충돌한 순간입니다. 경제를 읽다 보면 이런 장면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무역수지와 경상수지 편에서 읽었듯, 무역은 어느 편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의 이익이 충돌하는 구조의 문제입니다. 연대라는 이름 아래에도 그 구조는 작동합니다.
숫자로 읽는 현재 — 전쟁 중에도 계속되는 수출
지금 우크라이나 밀 수출은 어느 수준일까요.

2025/26 마케팅 연도(2025년 7월~2026년 6월) 기준으로 우크라이나의 밀 수출 전망치는 약 1,450만 톤입니다. 전쟁 전인 2021/22년의 약 1,950만 톤과 비교하면 여전히 약 25% 적습니다. 농지 피해, 인력 부족, 수확 장비 손상이 생산량 자체를 낮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곡물과 유지작물 전체를 합산하면 이 시즌 약 4,000만 톤 규모의 수출이 예상됩니다(시장 분석 기관 기준 추정치). 전쟁 3년이 넘도록 세계 식량 공급의 한 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숫자를 만들어내는 것이 앞서 읽은 세 경로입니다. 흑해 해상로 80~85%, EU 연대 통로 15~20%. 그 두 경로가 맞물리면서 우크라이나 밀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집트, 인도네시아, 레바논, 튀니지의 항구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 경로가 우리 계좌와 연결되는 방식
밀의 경제학 1편에서 시카고 선물시장이 라면값을 움직이는 구조를 읽었습니다. 그 선물 가격을 움직이는 가장 큰 변수 중 하나가 바로 오늘 읽은 이 경로들의 안정성입니다.

오데사 항구가 러시아 미사일 공격을 받았다는 뉴스가 나오면 시카고 밀 선물은 반응합니다. EU 연대 통로가 막힌다는 신호가 들어오면 곡물 관련 시장이 움직입니다. 경로 하나하나가 시장 신호입니다.
50대 투자자로서 이 흐름을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우크라이나 전황을 안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글로벌 원자재 시장의 리스크를 읽는 능력의 문제입니다. CPI와 물가 편에서 읽었듯, 식량과 에너지는 가장 빠르게 물가에 반영되는 변수입니다. 그 두 가지 모두 우크라이나라는 땅과 그 땅에서 나오는 수출 경로에 묶여 있습니다.
전쟁은 여러모로 승자가 없고, 패자와 상처만 확산시킵니다. 우크라이나 밀 수출 경로를 들여다보면 그 말이 숫자로 보입니다.
오십보의 정리
우크라이나 밀은 지금 두 개의 큰 경로로 흐르고 있습니다.
스스로 뚫은 흑해 해상로, EU가 열어준 연대 통로. 경로마다 리스크가 다르고, 비용이 다르고, 정치적 마찰이 다릅니다. 그 복잡한 길 위에서 세계 식량의 한 축이 매일 이동하고 있습니다.
Clooney님의 질문이 좋았던 이유는, "어떻게?"를 물었기 때문입니다. 경제는 숫자보다 구조를, 결과보다 경로를 이해할 때 훨씬 선명하게 보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한국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작물인데, 왜 한국은 밀을 스스로 키우지 못할까요. 기후, 수익성, 정책이라는 세 가지 이유를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오늘도 한 걸음, 오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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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 USDA AMS, "Ukraine Grain Transportation", June 2025
- EU 집행위원회, "Solidarity Lanes: Latest Figures", March 2026
- UNCTAD, "A Trade Hope", 2023
- SFS(호주농업연구기관), "Will Ukraine be able to export all of its grain in 2026", February 2026
- ASAP Agri, "Ukraine failed to exhaust EU wheat import quota in 2025", January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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