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다반사] 과달라하라 — 아랍어 이름을 가진 도시에서, 2,000년 전 피라미드 옆에서, 오늘 한국이 뛴다
오늘 6월 19일 오전 10시, 대한민국 대 멕시코의 2026 FIFA 월드컵 A조 2차전이 열립니다. 지난 12일 체코를 상대로 짜릿한 역전승(2대 1)을 거둔 대한민국은 이제 같은 경기장에서 개최국 멕시코와 맞붙습니다. 경기 장소는 멕시코 제2의 도시, **과달라하라(Guadalajara)**입니다.

그런데 이 도시의 이름을 잘 들여다보면 뭔가 이상합니다. 스페인어도 아니고, 원주민어도 아닙니다. 이 이름의 뿌리는 놀랍게도 아랍어입니다. '와디 알 히자라(Wādī al-Ḥijārah)'에서 왔는데, 뜻은 "돌이 많은 강"입니다. 이베리아 반도를 오랫동안 지배했던 무어인(아랍계 이슬람 세력)의 흔적이 스페인 정복자들의 언어 속에 남아, 태평양 건너 멕시코 땅의 이름이 된 것입니다. 스페인 마드리드 인근에도 '과달라하라'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정복자들이 낯선 대륙에서 고향 이름을 그대로 가져온 것입니다. 이름 하나에 아랍, 스페인, 멕시코 세 문명의 역사가 겹쳐 있는 도시. 내일 경기는 그런 곳에서 열립니다.
돌과 강의 도시 — 과달라하라의 탄생

과달라하라는 1531년 스페인 정복자들이 식민지 건설을 시작하면서 역사 기록에 등장합니다. 1542년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스페인 왕인 카를 5세의 인가를 받아 정식 도시로 출발했습니다. 멕시코 중서부 할리스코(Jalisco)주의 주도이며, 대도시권 인구는 400만 명을 넘어 멕시코시티에 이어 인구와 경제 규모 모두 멕시코 제2의 도시입니다.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1990년대 IBM과 같은 글로벌 IT 기업들의 생산 시설이 들어서면서 과달라하라는 멕시코의 기술 산업 중심지로 탈바꿈했고, '멕시코의 실리콘밸리'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고원의 온화한 기후 덕분에 "영원한 봄의 도시"라는 닉네임도 있습니다.
대표팀 입장에서는 이 도시의 또 다른 얼굴이 더 중요합니다. 바로 고도입니다. 에스타디오의 해발고도는 약 1,571m로, 강원도 오대산 정상에 맞먹는 높이입니다. 공기 중 산소 농도 자체가 크게 줄어드는 것은 아니지만, 공기 밀도가 낮아지면서 선수들의 호흡과 심박수가 평지보다 빠르게 오르고 체력 소모도 커집니다. 대한축구협회는 이 점을 고려해 해발 1,400m대의 미국 솔트레이크시티에서 2주 넘게 사전 적응 훈련을 진행했습니다. 반면 오늘 경기를 앞두고 함께 주목할 점은, 홈팀 멕시코는 이보다 훨씬 높은 해발 2,000m대 도시에서 평소 훈련해온 선수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고지대 적응에서는 분명한 안방 이점을 안고 있는 셈입니다.
에스타디오 과달라하라 — 화산을 닮은 경기장
오늘 경기가 열리는 경기장은 본래 '에스타디오 아크론(Estadio Akron)'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멕시코의 윤활유 제조사 아크론이 2017년부터 10년간 명명권 계약을 맺은 이름입니다. 다만 FIFA가 월드컵 기간 동안 후원사가 아닌 기업명이 경기장에 노출되는 것을 막는 '클린 스타디움' 규정을 적용하면서, 대회 기간 중에는 **'에스타디오 과달라하라'**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이 경기장은 멕시코 광역권 사포판(Zapopan)에 위치합니다. 2004년 착공했지만 재정 문제로 공사가 지연되며 6년 만인 2010년 7월 30일 개장했습니다. 건설비는 약 2억 달러(약 3,000억 원), 수용 인원은 49,813석입니다. 외벽이 천연잔디로 덮인 독특한 디자인으로, 전체적인 모티브는 화산입니다. 멕시코 리그의 명문 클럽 CD 과달라하라(일명 '치바스')의 홈구장이며, 이미 2011년 FIFA U-17 월드컵과 팬아메리칸 게임을 치른 경험이 있는 국제 규격의 경기장입니다.
한국 입장에서는 단순한 경기장이 아닙니다. 이번 대회 A조에서 대한민국은 체코, 멕시코, 남아공과 같은 조에 편성되었고, 1차전(체코)과 2차전(멕시코) 모두 이 경기장에서 치릅니다. 같은 잔디, 같은 공기, 같은 고도에서 두 경기를 연속으로 치르는 일정인 셈입니다.
한국과 멕시코 — 월드컵에서 만난 세 번의 역사
한국과 멕시코의 월드컵 역대 전적은 대한민국 입장에서 결코 유리하지 않습니다. 두 나라는 월드컵에서 세 차례 맞붙었고, 한국의 성적은 1무 2패입니다. 2018 러시아 월드컵 조별리그 2차전에서는 1대 2로 패했습니다.
그러나 역대 전적은 결국 과거의 기록일 뿐입니다. 내일 경기는 대한민국이 월드컵 역사에서 처음으로 개최국을 상대로 치르는 경기이기도 합니다. 홈 관중의 압도적인 응원이 예상되는 만큼, 경기장 분위기는 사실상 멕시코의 안방 경기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럼에도 1차전에서 먼저 승점 3점을 챙긴 대한민국이 이 흐름을 이어갈 수 있을지가 이번 경기의 가장 큰 관전 포인트입니다. 두 팀 모두 1차전 승점을 가져온 상황에서, 내일 경기의 승자는 32강 진출을 사실상 확정 짓게 됩니다.
도시 서쪽으로 — 세계 유일의 동심원 피라미드
과달라하라 이야기에서 가장 놀라운 대목은 도시 그 자체가 아닙니다. 도시에서 서쪽으로 약 60km 떨어진 작은 마을 테우치틀란(Teuchitlán) 인근에는 과치몬토네스(Guachimontones) 유적이 있습니다. 이 유적이 특별한 이유는 단 하나, 메소아메리카 전체를 통틀어 거의 유일하게 동심원(同心圓) 형태로 건설된 공공 건축물이기 때문입니다.

이 유적은 기원전 300년경부터 서기 900년경까지, 약 1,200년에 걸쳐 번성했던 테우치틀란 문명이 남긴 흔적입니다. 도시는 9개의 '구아치몬톤(원형 구조물)'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중 가장 큰 원형 피라미드는 높이가 약 18m에 이릅니다. 중앙의 원형 제단을 중심으로 동심원 모양의 테라스가 둘러싸고, 그 둘레를 따라 신전과 주거 공간이 배치되는 구조입니다. 이 구조는 화산 분화구나 원형 호수 같은 주변 자연 지형에서 영감을 얻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고, 천문학적 우주관과 신분 질서를 함께 담은 설계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테우치틀란 문명은 인근에서 산출되는 흑요석(화산 유리) 교역으로 부를 쌓았습니다. 같은 시기 멕시코 중부에서는 테오티우아칸 문명이 번성하고 있었고, 우리가 잘 아는 아즈텍 문명은 그보다 한참 후인 1300년대에 등장합니다. 테우치틀란 문명은 아즈텍보다 1천 년 이상 앞선 문명인 셈입니다. 그런데도 역사 교과서에서 잘 다루지 않는 이유는, 이 유적의 본격적인 발굴과 연구가 1970년대 이후에야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현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테킬라와 마리아치 — 문화의 수도
과달라하라는 고대 문명의 도시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멕시코를 대표하는 두 가지 문화의 발상지이기도 합니다. 하나는 **테킬라(Tequila)**이고, 다른 하나는 **마리아치(Mariachi)**입니다.
테킬라는 과달라하라 인근의 '테킬라'라는 마을 이름에서 유래한 술입니다. 이 마을과 주변 할리스코 고원 일대에서만 자라는 블루 아가베(용설란)를 증류해서 만들며, 이 지역의 아가베 경작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되어 있습니다. 테킬라가 단순한 술이 아니라 할리스코주의 토지와 기후와 식물이 빚어낸 '장소의 산물'인 셈입니다. 흥미롭게도 과치몬토네스 유적이 자리한 테우치틀란 인근은 바로 이 '테킬라 밸리' 지역이기도 합니다. 고대 문명이 의식과 농업에 활용했던 식물이 현대 세계적 증류주의 기초가 된 셈입니다.
마리아치는 멕시코를 상징하는 전통 음악이자 악단의 이름이며, 과달라하라는 마리아치의 발상지로 공인된 도시입니다. 챙 넓은 솜브레로(멕시코 전통 모자), 화려한 차로(기수 의상) 차림의 악단이 트럼펫, 바이올린, 기타, 비우엘라(작은 기타)를 들고 광장에서 연주하는 장면, 그것이 과달라하라의 일상입니다. 내일 경기장 주변에서도 마리아치 음악이 흘러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2,000년의 여정 — 고대 의식 구장에서 에스타디오 과달라하라까지

마지막으로 가장 흥미로운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테우치틀란 문명은 과치몬토네스 유적 안에 의식용 구기 경기장(Ball Court)을 함께 만들었습니다. 고무공을 사용한 메소아메리카 구기 종목은 올메카 문명에서 시작해 테우치틀란을 비롯한 여러 문명에 걸쳐 이어진 전통입니다. 이 경기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종교 의식의 일부였습니다. 오늘날 축구와 같은 것은 아니지만, 공을 차고 던지며 경쟁하는 인간의 본능이 이 땅에서 2천 년 가까이 이어져 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기원전 300년경, 과달라하라 서쪽 60km에서 테우치틀란 문명이 동심원 피라미드와 의식 구기장을 세웠습니다. 1531년, 스페인 정복자들이 '돌이 많은 강'이라는 아랍어 이름을 가져와 이 땅에 새 도시를 세웠습니다. 2010년, 그 도시 광역권에 3,000억 원짜리 현대식 경기장이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내일, 대한민국이 그 경기장에서 개최국 멕시코와 맞붙습니다.
2천 년의 여정 끝에 두 나라의 선수들이 같은 공간에 섭니다. 고대 문명이 천문과 우주의 질서를 읽어 동심원을 그렸던 그 땅 위에서, 태극마크가 빛나기를 바랍니다.
대한민국, 파이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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