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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보의 일상다반사

[오십보의 일상다반사] 오늘, 5월 22일이라는 날 — 장미 전쟁과 생물다양성의 날 사이에서

by 오십보 백보 2026.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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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보의 일상다반사] 오늘, 5월 22일이라는 날 — 장미 전쟁과 생물다양성의 날 사이에서


오늘은 5월 22일입니다.

달력에서 이 날짜를 들여다보다가 묘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571년 전 오늘, 영국에서는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34년 전 오늘, 지구에서는 다양성을 지키겠다는 약속이 맺어졌습니다. 같은 날짜 위에 전혀 다른 두 이야기가 겹쳐 있습니다.

May22_Cover_Roses_Biodiversity


571년 전 오늘 — 런던 북쪽 35킬로미터, 장미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1455년 5월 22일 오전, 영국 런던에서 북쪽으로 약 35킬로미터 떨어진 소도시 세인트올번스(St Albans). 요크 공작 리처드가 이끄는 군대가 좁은 골목길 방어선을 돌파하며 왕의 군대를 기습했습니다.

1455년 세인트올번스 전투 (좁은 골목길, 랭커스터 vs 요크 문장)

 

전투는 두 시간 남짓의 짧은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짧은 싸움이 이후 30년의 내전을 열었습니다. 영국 역사에서 **장미 전쟁(Wars of the Roses)**이라 부르는, 요크가(흰 장미)와 랭커스터가(붉은 장미)의 왕위 다툼이 시작된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세인트올번스 전투에서 헨리 6세는 전투 중 부상한 뒤 요크파에 장악됐고, 랭커스터파의 핵심 인물이었던 서머셋 공작이 전사했습니다. 사망자는 수백 명 수준으로 전해집니다. 대규모 전쟁의 기준으로는 작은 숫자입니다. 그러나 작은 충돌이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을 만들었습니다.

 

'장미 전쟁'이라는 이름은 사실 당시에는 쓰이지 않았습니다. 셰익스피어를 거쳐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문학적으로 정착된 이름입니다. 역사는 종종 이후의 시선이 이름을 붙입니다.

 

약 30년에 걸친 내전 속에서 많은 귀족 가문이 몰락했고, 영국 정치 질서는 크게 흔들렸습니다. 전쟁은 1485년, 랭커스터 혈통의 헨리 튜더가 요크가의 마지막 왕 리처드 3세를 보즈워스 전투에서 꺾으며 끝났습니다. 헨리 7세로 즉위한 그는 요크가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해 두 장미를 하나로 합쳤습니다. 튜더 왕조의 문장이 흰 장미와 붉은 장미를 겹친 '튜더 로즈'인 이유입니다. 겉은 붉고 속은 하얀 그 기묘한 장미 문장은, 역설적으로 피비린내 나는 싸움 끝에 간신히 찾아온 공존의 첫 걸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튜더 로즈 클로즈업 (붉은·흰 장미 결합 문장, 30년 내전 종결 상징)

 

물론 장미 전쟁을 오늘의 '다양성' 개념으로 그대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만 남기려는 경쟁이 얼마나 큰 소모를 낳는지는 분명해 보입니다.


34년 전 오늘 — 나이로비에서 맺어진 약속

1992년 5월 22일, 케냐 나이로비. 유엔 생물다양성협약(Convention on Biological Diversity, CBD) 조약문이 공식 채택됐습니다. 같은 해 6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지구정상회의를 계기로 각국의 서명이 이어졌고, 이후 이 협약은 세계에서 가장 폭넓게 참여한 환경 협약 가운데 하나가 됐습니다. 현재 당사국은 196개국입니다.

1992년 나이로비 CBD 협약 체결 (유엔 회의장, 지구·식물 다양성 배경)

 

협약의 핵심은 세 가지입니다. 생물다양성 보전, 생물자원의 지속가능한 이용, 유전자원 이용 이익의 공정한 공유. 지구의 생명이 한쪽으로만 흐르지 않도록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이후 유엔은 이 날을 기념해 5월 22일을 **'국제 생물다양성의 날'**로 지정했습니다. 처음에는 협약이 발효된 1993년 12월 29일이 기념일이었는데, 연말 연휴와 겹쳐 행사 개최가 어렵다는 이유로 2000년 지금의 날짜로 옮겼습니다.

 

생물다양성이라는 말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1985년입니다. 생물학자 월터 G. 로젠이 'biological diversity'를 줄여 'biodiversity'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했습니다. 불과 40년 전 일입니다. 그토록 중요한 개념에 이름이 붙은 것이 이렇게 최근의 일입니다.


다양성을 없애는 싸움과, 다양성을 지키는 약속

오늘 이 두 이야기를 나란히 놓으면서 한 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오늘날 꽃집에서 보는 장미들도 인간의 입맛에 맞게 품종을 단일화하고 개량하는 과정에서 고유의 향기를 잃거나 병충해에 취약해졌다는 사실입니다. 단일화의 덫은 500년 전 왕가의 문장이었던 장미에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먹는 식탁 위 과일에도 그대로 재현됐습니다.

 

생물다양성이 왜 중요한지는 이미 역사가 증명했습니다. 1950~60년대 전 세계가 즐기던 그로 미셸(Gros Michel) 바나나는 파나마병 확산으로 세계 수출시장에서 사실상 자취를 감췄습니다. 지금 우리가 먹는 캐번디시(Cavendish) 바나나는 그 대체종입니다. 그런데 캐번디시도 지금 변종 파나마병(TR4)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다양성이 없으면 위기 앞에 대안이 없습니다.

바나나 품종 비교 (1950s 그로 미셸 vs 현재 캐번디시, 파나마병 경고)

 

투자에서도 같은 논리가 작동합니다. 미국 기술주만, 부동산만, 원화 자산만 붙드는 습관은 생각보다 쉽게 '현대판 단작'이 됩니다. 오십보가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분산 투자의 핵심도 결국 다양성입니다. 농부들이 한 품종에만 의존하지 않고 다양한 종자를 보존하려는 이유, 그리고 우리가 자산을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입니다.


5월 22일이라는 날

571년 전에는 좁은 골목길에서 두 가문이 왕관 하나를 두고 싸웠습니다. 34년 전에는 각국이 지구의 모든 생명이 함께 살아갈 권리를 약속했습니다.

다양성 생존 전략 (생태계·투자 포트폴리오·생물 네트워크 3패널 통합 메타포)

 

같은 날짜 위에 이 두 이야기가 겹쳐 있다는 사실은 우연일 뿐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대비만큼은 오래 남습니다.

하나만 남기려는 경쟁은 잠시 승자를 만들 수는 있어도, 공동체 전체를 더 약하게 만들기 쉽습니다. 다양성은 불편하고 복잡하지만, 그것이 생태계를 살리고 시장을 살리고 사람을 살립니다.

 

오늘도 한 걸음, 오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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