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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의 식탁

[석유 심화 4편] 석유 없는 세상은 가능한가 — 에너지 전환, 수소, 그리고 정유사의 선택

by 오십보 백보 2026.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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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심화 4편] 석유 없는 세상은 가능한가 — 에너지 전환, 수소, 그리고 정유사의 선택

 


1편에서는 정유소가 원유를 어떻게 분해하는지를 보았습니다. 2편에서는 원유가 땅속에서 주유소 앞까지 이동하는 여정을 따라갔습니다. 3편에서는 정유소 맨 아래 남는 찌꺼기들이 아스팔트·윤활유·플라스틱으로 변신해 현대 문명을 구성하는 과정을 살펴봤습니다. 이제 4편에서는 가장 불편하고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해야 할 차례입니다.

"석유 없는 세상은 가능한가"

 

그래서, 석유 없는 세상은 언제 올까요. 그리고 그것이 정말 가능하기는 한 걸까요.


피크 오일 — 석유 수요는 언제 정점을 찍는가

2015년쯤 에너지 업계에는 '피크 오일(Peak Oil)'이라는 단어가 유행했습니다. 전기차가 확산되고 재생에너지가 성장하면 석유 수요는 빠른 속도로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이었습니다. IEA(국제에너지기구)는 한때 2025~2030년 사이에 석유 수요 정점이 올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습니다.

피크 오일 — 수요 정점은 언제인가

 

그런데 2024~2025년 IEA가 잇따라 발표한 세계 에너지 전망(World Energy Outlook)은 이 그림을 상당히 바꿔놓았습니다. 미국의 기후 정책 변화, 전기차 보급 속도 둔화 등 현실을 반영해 새로 추가된 '현재 정책 시나리오(CPS)'에서는, 전 세계 석유 수요가 2050년 하루 1억 1,300만 배럴까지 증가할 수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이는 2024년 수요 대비 약 13% 증가한 수치입니다. 맥킨지(McKinsey) 역시 에너지 전환의 속도 둔화를 경고하며 2050년에도 화석연료 비중이 전체 에너지의 40% 이상을 유지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세 가지 현실이 있습니다. 첫째, 전기차는 예상보다 빠르게 보급되고 있지만, 전 세계 차량의 절대 대수 자체가 함께 늘고 있습니다. 특히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인도에서 내연기관차 신규 수요가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둘째, 화물선, 항공기, 중장비, 선박의 연료를 전기로 완전히 대체하는 것은 2050년 이후의 과제입니다. 셋째,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이유 — 석유는 에너지 이상의 무언가입니다.


석유는 에너지가 아닌 곳에서 살아남는다

이것이 이 시리즈의 핵심 반전입니다. 우리는 석유를 "연료"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동차를 움직이고, 비행기를 날리고, 발전소를 돌리는 연료. 그런데 3편에서 살펴봤듯이 원유의 쓰임은 에너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석유의 진짜 쓰임 — 연료 vs 소재

 

승용차 연료로 쓰이는 석유 비중은 전체의 약 **26%**입니다. 이 부분은 전기차로 상당 부분 대체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나머지 74%는 화물 운송, 항공, 선박, 난방, 그리고 무엇보다 석유화학 원료로 쓰입니다. IEA의 탄소중립 시나리오(NZE) 기준으로도 2050년에 여전히 사용되는 석유의 71%는 비에너지 용도, 즉 플라스틱·합성섬유·윤활유·아스팔트·의약품 원료로 소비됩니다.

 

다시 말해, 모든 자동차가 전기차로 바뀐다 해도 플라스틱 생수병, 스마트폰 케이스, 합성섬유 운동복, 타이어, 의약품 캡슐을 만드는 데 여전히 원유가 필요합니다. IEA는 2050년까지 석유화학이 원유 수요 증가의 최대 동인이 될 것이라고 분석합니다. 이것이 "석유 없는 세상"이 단순히 전기차 보급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래도 변화는 온다 — 에너지 전환의 세 갈래 길

그렇다고 현상 유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에너지 전환은 분명히 진행 중입니다. 다만 그 경로가 생각보다 복잡하고 더디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갈래는 전기화(Electrification)입니다. 승용차의 전기차 전환은 가장 빠른 속도로 진행 중입니다. 2030년 전후로 주요국에서 신규 내연기관차 판매가 금지되기 시작하면, 이 흐름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다만 기존 내연기관차 약 15억 대가 완전히 전기차로 교체되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립니다.

 

두 번째 갈래는 수소(Hydrogen)입니다. 전기화가 어려운 산업 분야 — 철강, 시멘트, 화학, 장거리 화물 운송, 항공, 선박 — 에서 수소가 대안으로 부상합니다. 수소는 연소 시 물만 생성되기 때문에 탄소 배출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세 번째 갈래는 탄소 포집(CCS/CCUS)과 재생에너지의 결합입니다. 불가피하게 화석연료를 써야 하는 공정에서 탄소를 포집해 저장하거나 재활용하는 기술입니다. 기술은 있지만 비용이 아직 높습니다.


수소 — 가능성과 현실 사이

수소에는 '색깔'이 있습니다. 그 색깔이 현실을 말해줍니다.

수소 — 가능성과 현실 사이

 

현재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수소의 약 95%는 **그레이 수소(Grey Hydrogen)**입니다. 천연가스나 석탄을 고온·고압으로 개질(Reforming)해서 만드는데, 이 과정에서 이산화탄소가 대량 배출됩니다. 여기에 탄소를 포집해 저장하면 **블루 수소(Blue Hydrogen)**가 됩니다. 재생에너지로 생산한 전기로 물을 전기분해해서 만들면 **그린 수소(Green Hydrogen)**가 됩니다. 진정한 의미의 청정 수소는 그린 수소뿐이지만, 현재 생산 비중은 극히 낮습니다.

 

현실적 문제는 비용입니다. 그린 수소의 생산 단가는 화석연료 기반 수소보다 1.5~2배 이상 비쌉니다. 전 세계 수소 시장 규모는 2025년 약 200억 달러 수준으로 성장했지만, 그린 수소 특화 시장은 아직 그 일부에 불과합니다. 한국의 그린 수소 생산 단가는 kg당 10달러 안팎으로 알려졌으며, 재생에너지 여건이 불리한 한국의 특성상 2050년에도 주요국 중 가장 높은 수준(IRENA 분석 기준 kg당 2.9~4.1달러)에 머물 것으로 전망됩니다. 이 때문에 태양광이나 풍력 에너지가 충분하고 저렴한 호주, 중동, 북아프리카에서 그린 수소를 생산해 한국에 가져오는 것이 현실적인 경로로 논의되고 있습니다.

 

2025~2026년은 업계에서 수소 산업의 '심판의 해(Year of Reckoning)'로 불리기도 합니다. 2024년 전 세계 수소 프로젝트 발표 건수가 전년 대비 80% 이상 급감할 만큼 투자 열기가 식었기 때문입니다. 기대와 현실 사이의 간극이 좁혀지느냐, 아니면 투자 실망으로 이어지느냐를 가르는 시기가 바로 지금입니다.


정유사의 선택 — 변신하거나 축소하거나

에너지 전환 시대에 정유사 앞에는 크게 세 가지 길이 있습니다.

정유사의 선택 — 변신하거나 축소하거나

 

첫 번째 길은 석유화학으로의 전환(Crude to Chemicals)입니다. 에너지 수요가 줄어도 화학 소재 수요는 유지되거나 늘기 때문에, 정제 마진 대신 화학 마진으로 수익 구조를 바꾸는 전략입니다. 에쓰오일의 샤힌 프로젝트가 바로 이 전략의 최전선입니다. 9조 2,580억 원을 투자해 원유를 직접 석유화학 원료로 전환하는 세계 최초 상용화 기술(TC2C)을 구현하고 있습니다. 사우디아람코와 에쓰오일의 합작 결정이 단순한 설비 투자가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두 번째 길은 수소·재생에너지 사업 진출입니다. HD현대오일뱅크는 2032년까지 8,300억 원을 투자해 서산 대산항에 그린 수소와 암모니아를 생산·유통·보관하는 복합시설을 신설합니다. GS칼텍스는 재생에너지와 수소 사업을 병행하며 탄소 감축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SK에너지는 배터리·전기차 충전 인프라와 연계한 에너지 서비스 기업으로의 전환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각자의 강점과 자산을 활용해 조금씩 다른 경로를 선택하고 있지만, 방향은 같습니다. 에너지 전환 기업으로의 체질 개선입니다.

 

세 번째 길은 효율화와 선택적 집중입니다. 모든 정유사가 수소 기업이나 화학 기업으로 전환할 수는 없습니다. 비용이 많이 들고 기술 역량도 필요합니다. 일부 정유사들은 오히려 규모를 줄이고 가장 경쟁력 있는 정제 설비와 공급망에만 집중하는 선택을 합니다. 수요가 줄어드는 시장에서 살아남는 또 다른 방법입니다.


석유 없는 세상 — 시나리오별로 읽기

그렇다면 결국 "석유 없는 세상"은 언제 오는 걸까요. 오십보는 세 가지 시나리오로 정리합니다.

 

시나리오 A — 현재 정책 유지(CPS): IEA 분석에 따르면 2050년 석유 수요가 오히려 현재보다 13% 늘어납니다. 이 경우 석유 없는 세상은 21세기 내에 오지 않습니다. 에너지 전환이 기대보다 훨씬 느리게 진행되는 세상입니다.

 

시나리오 B — 적극적 기후 대응(NZE): IEA의 넷제로 시나리오에서조차 2050년에 사용되는 석유의 71%는 비에너지 용도입니다. 에너지 연료로서의 석유는 크게 줄지만, 화학 소재 원료로서의 석유는 살아남습니다. 이 경우 "석유 없는 세상"이 아니라 "에너지로서의 석유 없는 세상"이 2050년 전후에 가능해집니다.

 

시나리오 C — 기술 혁신 가속: 그린 수소 단가가 획기적으로 낮아지고, 바이오 기반 플라스틱과 화학적 재활용이 상용화되며, 배터리 기술이 항공·선박에도 적용 가능해진다면 석유 수요의 급격한 감소가 2040년대에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현재로서는 가장 낙관적인 시나리오입니다.


석유 심화 시리즈를 마치며

4편에 걸쳐 원유의 분해, 운반, 잔유 활용, 그리고 에너지 전환이라는 흐름을 따라왔습니다. 오십보가 이 시리즈에서 계속 강조해온 하나의 결론이 있습니다.

 

석유는 단순한 연료가 아닙니다. 우리가 입는 옷, 마시는 물병, 타는 타이어, 걷는 도로, 복용하는 약 캡슐까지. 현대 문명의 물질적 기반 상당 부분이 원유에서 왔습니다. "석유 없는 세상"은 단순히 전기차를 타고 태양광 패널을 다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화학 소재·의약품·합성섬유·건설 소재의 근본적인 원료 전환이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정유사들은 지금 그 전환의 선택지 앞에 서 있습니다. 에너지 기업에서 소재 기업으로, 화석연료에서 수소로, 정제에서 화학으로. 그 변신이 성공하면 이 기업들은 에너지 전환 이후에도 살아남습니다. 그 변신에 실패하면, 석유와 함께 역사 속으로 들어갑니다. 오십보는 그 과정을 앞으로도 계속 지켜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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